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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춘언니 | 이수정 감독, 임재춘 주인공 초청

CINE TALK 씨네 토크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6. 15.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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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춘언니> 씨네토크

/2022.04.12

이마리오 감독 진행
이수정 감독, 임재춘 주인공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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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리오 : 오늘 재춘언니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게 된 강릉에서 사회적협동조합 인디하우스에서 일하는 이마리오라고 합니다. 먼저 두 분 멀리서 오셨는데 인사말 잠시 있겠습니다.

이수정: , 반갑습니다. 강릉에 굉장히 몇 년 만에 오는데요. 여러분들을 뵈어서 반갑습니다. 이수정입니다.

 

임재춘 : 반갑습니다. 재춘이의 임재춘입니다.

 

이마리오 : 임재춘님은 대전에서 차로 바로 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세 시간 좀 넘게 걸려서 오셨고요. 제가 초반에 질문을 몇 개 준비해온 것들을 먼저 드리고요. 그 다음에, 아마 질문하실 게 굉장히 많으실 것 같아요. 주인공이셔서. 중간쯤에 마이크를 드릴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임재춘님한테 질문을 좀 드릴게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긴 하겠지만,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콜트-콜텍 투쟁과 관련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있어서, 어떻게 됐고 어떻게 정리가 됐는지.

 

임재춘 : 그 부분은 보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사실 2006년도에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1년 만에 직장이 폐쇄를 당했고, 정리해고를 당해 그때부터 대전에서 하다가 인천으로 나와갖고, 예술인들도 많이 만나 뵈면서 영화를 찍고, 연극도 하고 하는 내용입니다. 아시다시피 마지막에 합의를 했고요. 지금은 다 개인적으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하면 됐겠죠?

 

이마리오 : 옆에 계신 이수정 감독님께서 2015년도에 뉴스타파의 목격자들이라는 게 있어요. 거기서 이제 콜트-콜텍 3000일 정도 시기를 맞춰서 만든 정도의 35분 정도의 작품이 있는데, 그걸 보시면 콜트-콜텍의 투쟁과 관련된 것들이 굉장히 잘 정리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관심 있으신 분들은 꼭 한 번 찾아보시면,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실 것 같고요. 그 작품을 보면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문제 부분, 투쟁이라는 다큐멘터리들이 가지고 있는 방식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은 결이 좀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고민이 좀 많으셨을 것 같아요. 왜냐면, 콜트-콜텍이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고 그전에 다른 작품으로 다큐멘터리가 나오기도 했었고. 근데 시간도 굉장히 많이 지나고, 저걸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이런 고민들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이 가장 큰 고민이셨나요?

 

이수정 : 2009년에 김성균 감독의 <기타 이야기>를 통해서 저도 콜트-콜텍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됐고요. 2010년 꿈의 공장도 만드셨고, 아까 보신 <9일만 햄릿> 연극을 할 때 김성균 감독이 영상으로 참여를 하면서 저도 같이 영상 기록으로 참여하면서, 그 연극 공연을 중심으로 묶은 <내가 처한 연극>이라는 그런 작품까지 김성균 감독이 콜트-콜텍 3부작이라고 할 만한 거를 2013년까지 작업을 하셨었고요. 저 같은 경우는 2012년부터, 우리 콜트-콜텍 분들의 촬영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이제 이분들이 2011년도에 투쟁 5년 차 되던 해에 콜밴이라는 거를 만들었어요. 이제서야 기타를 배워서 밴드를 만들어서 공연을 하면서 이 투쟁을 좀 알려야 되겠다, 그렇게 이제 그 무렵에 기록을 시작해서 밴드 이야기로 처음에 출발을 했었어요. 그리고 많은 예술인들이 결합하면서 이분들이 이제 음악 활동, 밴드, 연극도 만들고 시 낭독도 하고 그런 다양한 노동자들이 예술 활동을 하는 그런 걸 중심으로 시작을 했었는데요. 2013년도 대법 재판에서 최종 패소하면서 투쟁이 장기화되는 조짐이 보였고 언제 끝날지, 이분들도 모르고 저도 모르고. 그래서 좀 장기 투쟁에 대한 걸로 기획이 좀 바뀌었다가. 계속 제목도 여러 차례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 프리랜서>, 그다음에 <남은 자들의 노래>, 그다음에 뭐, <13>, ,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동자 얘기를 하다가, 노동자 얘기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런 제목은 2019년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콜트-콜텍 투쟁사를 정리해봤던 편집본이 있었는데 여러 사정에 의해서 덮을 수밖에 없었어요. 2020년 초에. 그래서 저도 굉장히 힘든, 어떤 심적 문제로 힘들었던 와중에 약간 벼랑 끝에 내몰려 가지고 모든 것을 좀 다 비워야 되겠다. 이런 생각 끝에, 가장 내가 애착이, 애정이 가는 어떤 장면들 이런 걸 생각하다 보니까 임재춘을 중심으로 좀 구성을, 기획을 하게 됐고요. 그래서 <재춘언니>라는 제목을 2022년 처음에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보신 건 <재춘언니>라는 제목으로 임재춘을 중심으로 구성한 콜텍, 대전 콜텍에서 올라온 분들의 투쟁 합의, 그리고 이후를 엮은 영화입니다.

 

이마리오 : 방금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투쟁하시는 노동자들이 콜밴을 하고 있으셨고, 주변에 얘기하시는 많은 분들이 계셨는데, 그중에 유독 옆에 있는 임재춘님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들어야 되겠다고 했던 과정이 근원적으로 어떤 것이었어요?

 

이수정 : 글쎄요. 다큐멘터리도 극영화처럼 일종의 캐스팅이라는 게 있는데, 다큐의 주인공을 어떤 사람이 많이 할까. 일단 매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영화 주인공인데. 저에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었어요, 임재춘님이. 그리고 또 다양하게 여러 모습들이 찍혀져 있고, 영화의 주인공은 어떤 변하지 않는 인물보다는 변화가 그림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보여야 되는데 그런 것들이 다행히 담겨 있었고요. 임재춘 특유의 어떤 매력 때문에 현실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 아니었나 싶어요. 연대해온 사람들한테도 가장 친근감이 있고 가장 따뜻하게, 편하게 얘기 나눌 수 있는 인물이 임재춘. 무슨 다른 직함을 맡고 있는 이런 분들보다도 밥을 해주는 (웃음) 뒤에서 궂은일을 하는 임재춘이라는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마리오 : 임재춘님께 질문드릴게요. 자기의 과거의 모습이 영상에 담겨 큰 스크린에서 보는 기분이 굉장히 의아할 것 같은데, 지금 이제 완성된 영화를 첫 번째 보셨을 때 어떠셨어요, 느낌이? 거기에 담긴 이야기가 잘 안 들어왔을 것 같기도 하고, 어떠셨어요?

 

임재춘 : 사실 이수정 감독님이 하기 전에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카메라로 찍으면 벌벌대고. 나 같은 경우는 벌벌대고 했는데, 이후에는 말 잘하거든요. 나를 왜 택했는지는 약간 아는데. 내가 그걸 했었어요. 누가 오면, 한 명이라도 더 오게 하려면 사람들한테 밥이나 이런 걸 챙겨줘야 되겠다. 챙겨주고 투쟁. 사 먹는 거보다 그래도 해서 먹여야 누구라도 한 명 더 올 거 아니냐. 이런 차원에서 자꾸 그걸 생각을 했지요. 나는 맨날 이야기하지만 카메라를 찍는 걸로 뭔가 영화가 될까, 생각을 했거든요. 이수정 감독 카메라가 크지도 않고. (일동 웃음) 근데 알고 보니까 나중에는, 그 영화가 좋은 감독 만나갖고 출세한 거지. (일동 웃음)

 

이마리오 : 영화 완성되고 첫 번째로 보셨을 때 어떠셨어요, 느낌이?

 

임재춘 : 깜짝 놀랐지요. 왜 나를 두고? 왜 말 못하는 나한테? 나를 크게 만들어 놓나. 그리고 하면서도, 궁금한 게요. 그게 우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인데 7, 거의 10년을 같이 다녔더라고요. 우리 인연이 끈질긴 인연이구나. 이 좋은 작품을 만들라고 10년 따라다니지 않았나. 중간에 엄청나게 많았었거든.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특히 말을 한 거를, <시 읽는 시간>하고 두 개를 했거든요? 중간에 이란희 감독의 <주말퇴근>. <휴가>도 내가 주인공인데 짤렸지. 이봉하 배우 (오면서). 사실 이 감독님이 고생 많이 하셨어요. 고맙다고 생각해요. 촌놈을 이런 데 와서 말도 잘하게 만들고. 행복하실 거예요.

 

이마리오 : 영화 개봉하고 나서 신문 기사 내용 중에 임재춘님께서 딸 얘기를 하면서 실제로 따님이 두 분이 있는데 아직 영화를 안 봤다. 근데 아직도 안 봤나요?

 

임재춘 :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보라고는 했는데 아직 본지는. 본다고는 안 하는데 모르는 게 있겠죠. 내가 모르는. 보면 내가 뭔 얘기를 했는지를 거의 다 알거든요. 근데 지금까지 <주말퇴근>이나 한 번도 안 봤다고 하는데. 아마 영화를 봤겠죠. 근데 얘기를 전혀 안 해요.

 

이마리오 : 안 물어보셨어요?

 

임재춘 : 너무 이제 어릴 때, 중학교, 고등학교 때가 한참 시작할 때거든요. 그래갖고 봤는지 안 봤는지를 얘기를 안 해. 사실 보라고는 했는데 안 볼 것 같아요.

 

이수정 : 그때 딸들이 굉장히 힘들 때, 사춘기 때 아빠의 부재로 큰딸이 작은 동생을 위해서 서울에 대학도 합격한 데를 포기하고 대전에서 동생 밥해주느라고 그렇게 아팠던 부분들이 많고 해서 차마 아빠가 나오는 얘기를 보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인터넷이나 이렇게 다 찾아보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어디선가 몰래 볼 수도 있고. ,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어떻게 정말 저 같은 사람은 사실 그런 마음을 짐작조차 못 할 것 같아요.

 

이마리오 : 신영에서 개봉했던 이란희 감독의 <휴가>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여기 임재춘님이세요. 왜냐면 다큐멘터리 <재춘언니>에 집 장면이 잠깐 나오잖아요. 따로 얼굴은 안 나오고 목소리만 나오긴 하지만. 그런 걸 보면서 실제와 굉장히 유사하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는지. 이란희 감독님과 얘기를 좀 많이 하셨나요? 이거에 대해서?

 

임재춘 : 이건(<재춘언니>) 안 했었고. <휴가><주말퇴근>을 하면서 같이 할 때도 이런 영화를 찍으라고 하는데 뭐 해달라는 걸 많이 해줬죠. 이수정 감독님은 그냥 찍어놓은 거 많다 그래서. 이란희 감독은 같이 하기 전에도 영화를 이렇게 만들려 하는데 해서 대한민국 노동 현장을 다 소개를 했죠. 그렇게 한 몇 번, 다섯 번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주말퇴근><휴가>를 만들었다 생각하면 돼요.

 

이수정 : <주말퇴근>이라고 유튜브에 콜트-콜텍 주말 퇴근 이렇게 검색을 치시면 저도 거기에 까메오 출연을 하는데요. 이 콜텍 분들이 직접 (만든) 극영화예요. 다큐가 아니라. 극영화인데, 직접 출연을 하시는 거예요. 자기 역할, 본인들이 본인 재연 연기를 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 <천막>이라는 단편도 있잖아요. 이란희 감독님의. <천막>이 장편화 되면서도 새로운 얘기들을 집어넣고. 픽션이니까, 허구의 이야기로 구성한 게 휴가인데 그런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이란희 감독이 임재춘씨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을 일일이 만나고 다니면서 상상을 실현했는데 저는 다큐를 만드는 입장에서 너무 부러운 거예요. 다큐는 갈등 상황을 다 담을 수가 없잖아요. 알고는 있어도. 근데 극영화에서는 표현할 수가 있잖아요, 극영화의 형식으로. 허구의 구성이니까. 그래서 그런 점이 부럽기도 하고, 극영화가. (웃음) 그랬습니다.

 

이마리오 : 다음에는 극영화를 하시는 건가요, 그러면?

 

이수정 : (웃음) 기회가 된다면 또 극영화를.

 

이마리오 : 작품 얘기를 좀 해보면 요즘에 개봉하는 영화들 중에, 예술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들 중에 굉장히 드물긴 하죠. 4:3 화면비를 하고, 또 흑백으로만 하는 영화도 이제 드물기도 한데, 굳이 4:3 화면을 쓴 이유가 있으실 거 같고. 거기다가 컬러가 아니고 전체적으로 흑백으로 기획을 했잖아요. 흑백으로 하셨던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 어떤 지점들이 고민이 많이 되셔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이수정 : 촬영할 때는 물론 16:9 화면비에 컬러로 촬영을 했던 거고요. 후반에 <재춘언니>라고 제목을 정하고 기획을 다시 바꿨을 때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처럼 가져가고 싶었어요. <모던 타임즈>라는 경제 대공황 시기에, 컨베이어 벨트에 노동하는 그런 기계 속의 부품이 되어 가지고 빨려 들어가는 그런 노동자의 모습이라던지, 떠돌이 이미지? 이런 것들이 천막 생활을 15년 동안이나 했던 임재춘의 이미지와 잘 맞는다고 생각이 됐고요. 해서 구성 자체도 흑백 무성영화처럼 아예 16:9가 아니라, 양 화면이 화면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4:3 화면비로 하면서 인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끔 하는 게 좋겠다 생각이 들었고 흑백을 하면 색채의 정보가 많이 줄어들고 인물에 좀 더 집중이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흑백으로 한다고 결정을 하고 나니까 이게 이분들의 13년이라는 시간이 갖는 의미랑도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3년이라는 유예기간 같은, 그리고 어떻게 보면 꿈. 한바탕 꾼 꿈같은 시간인데 다시 컬러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흑백인 시간이 꿈이었고 컬러의 시간이 현실이니까 어떤 게 꿈인지 현실인지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대비를 좀 주고 싶었습니다.

 

이마리오 : 임재춘님은 어떠셨어요? 제목이 <재춘언니>라는 제목으로 나왔고 흑백으로 나왔고 이런 것들을 보셨을 때 주인공으로서 실제의 나의 모습들이 담긴 것들인데 그런 게 굉장히 다르게 느껴지셨을 것 같아요.

 

임재춘 : 어떻게...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러는데요. 내가 주인공을 하면 다른 사람들도 해야 되는데, 다른 사람들도 더 아프지 않을까 엄청 고민했거든요.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를 했을까. 어떻게 되었든 아까 얘기했지만 감독님이 출세한 거지요. 영화배우도 하고 오필리아도 해보고. 회사 다닐 적에 저는 이제 노래방도 안 갔거든. 오로지 회사 집 그거밖에 몰랐었거든요. 서울 올라와서 영화부터 밴드까지 안 해본 게 없고. 그전까진 사회를 몰랐었거든요. 투쟁하면서 우리같이 재밌게 투쟁하면서 사회를 새로 배웠기 때문에 우리가 끝까지 버티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마리오 : 그러면 관객석에 마이크를 좀 넘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손을 들어주시면 마이크를 전달해드릴 겁니다. 질문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감상평이나, 지지나 연대의 이야기를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관객1 :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임재춘님 그 영화 속에 합의문 조인식 장면, 4,400일 넘어가고, 단식 사십 며칠일 때 곧 돌아가실 듯한 모습을 감독님께서 촬영하셨던 것 같은데. 임재춘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합의문 조인식 하셨던데 형편없는 합의를 했다고 굉장히 실망 혹은 서운하셨다 회상하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강성노조 3개월 이상을 참여했던 거 같은데 당연히 그, 콜텍 노조 측에서 요구한 협상이라는 걸 통해서 얻은 건 무엇이고 아쉬운 건 무엇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 여쭤보고 싶고요. 기타를 30년 동안 만드셨으면 상당한 기타 연주 수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일반인의 궁금함이 생겼습니다. 해고된 다음에 5년쯤 지난 다음에 기타를 배우셨다는 말씀이 있으셔서 의아했습니다. 감독님께도 질문드리겠습니다. 아까, 재춘 언니, 영화 속에서는 재춘 형이라고 하셨는데 언니라고 이름을 바꾸게 된 이유가 있으신지. 매력적인 인물이라 하셨습니다. 당사자가 계시지만 관객을 위해서 몇 가지라도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는지 좀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임재춘 : 사실 그때, 2013~2014년도에 사장을 그때까지 한 번도 못봤어요. 아까도 이 영화에 나오지만 처음으로 거기에 갔는데 사장이 있는 거예요. 14년 동안 얼굴만 보려고 해도 못봤는데 갑자기 올라온 게 황당하죠. 제대로 기회가 없었던 거죠. 싸움도 많이 했지만은. 이제 저기 사장은 돈 버는 것만 알지 쓸 줄을 몰라요. 아까 감독님이 먼저 얘기를 하셨지만은, 의자도 소파도 다 다른 거고. 우리는 화려할 줄 알았거든요. 잠바떼기나 입고 딱 그래요. 가만히 있어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대꾸도 안 하고 가만히, 눈 감고. 그러면서 합의하는 조건도 나는 그때 당시 우리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거거든요. 합의 안 하려고 했어요. 그때는 청와대가 (개입해서) 월급도 못 받고 퇴거 안 하겠다, 그냥 끝나고 가자, 내가 60일까지 가서 쓰러져 죽더래도 합의하지 말자, 했는데 쑥덕쑥덕하더니 딱 두 번 만남에 얘기를 들었던 결과는 두 번 지나고 끝났더라고요. 황당하더라고요.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수다 떨다가 최저임금도 안 되는 걸로 합의를 했거든요. 그걸 꼭 받아야 되겠냐. 쪽팔리잖아요. 하지 말자. 13년이라는 세월의 보상이라는 걸 받으려면 더 해야 하는데 우리는 할 게 없잖아. 지금도 생각을 해보면 문재인 대통령 임기 때거든요. 그때 합의를 안 했으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지금도 과연 대한민국에서 1,500일 이상 투쟁하는 사업장들이 과연 있을까. 요즘에 의아해하거든요. 그런데 합의를 할 때는 왜 그렇게밖에 못했나. 자본의 논리인데. 지금도 이해가 안 가요. 왜 우린 그거 가지고 했지? 10년 동안, 빚진 거 하나도 못 갚는 거고. 하면서도 억울해도 어쩔 수 없이 가자. 안 받는 것보단 낫지 않냐. 안 받을라 했다가 낫지 않냐. 최소로다가 합의를 한 겁니다. 저 양반들도 안 했으면 사장이 혼쭐을 냈겠지요. (우리는) 인원도 없었어요. 인원이 25명밖에 안 됐거든요? 최소한으로다가 합의했습니다, 사실. 우린 최악의 합의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지금까지 투쟁한 역사를 되짚어 보면, 그만큼 못 받은 사람도 없지만, 그렇게 안 나오거든요. 노동자가 뚝심으로 살지. (투쟁을) 엄청나게 하면서도 우리는 행복한 투쟁을 했으니까, 옆에 사람들 위해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도 있고.  최소한으로 해서 다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데요. 사실 그게 너무 억울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지금까지 했다면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루하루 최악의 경험을 하고. 그때 당시 국회의원이 나와서 하긴 했는데. 국회의원들 정신차리라고 해야 한다니까요. 최소 10년 동안 먹고 산 최저임금은 줘야 할 거 아니야. 최저임금도 안 주는 상황에서 합의할 때. , 노동자들의 현실이 말이 아니구나.

 

이수정 : 이제 그, 사실 저도 옆에서 지켜보니까 이분들이 13년까지 싸운 것은 처음에 정리해고 무효소송을 시작해서 사회적 인정 간의 어떤 복지, 이런 걸 목표로 싸웠을 거 아니에요. 근데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하고, 패소하게 된 과정은 여러분들 아시겠지만 양승태 재판관의 사법 농단 건이 있었던 때잖아요, 박근혜 정권 시기에. 그런데 그거 이후에도 계속 싸워온 거는 단지 규칙도 아니고 뭐도 아니고 우리가 계속 싸우지 않으면 이런 기업들이 계속 쉬운 정리해고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종 판결문이 장차 미래에 올 경영상의 위기에 의해서 해고가 정당하다 판결문을, 어이없는 판결이었던 거예요. 건실한 기업인데. 이런 것들을 계속 알려내고, 사회적 운동 활동 차원에서 콜밴 활동을 하면서 계속 버티고 있었는데 이분들도 가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언젠가는 마무리를 지어야 될 시점은 있었다고 저도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마지막에 끝장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범사회적 투쟁을 각계각층의 힘을 합쳐서 끝장 투쟁이라는 걸 시작을 했고 그런 와중에 물밑에서 회사 측과 민주노총 노조위원장 협상단들이 몇 차례, 그래서 협상 테이블에 있는데 일곱 차례 가도록 합의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아까 말씀하신 대로 막판에 청와대 쪽으로 들어가서 어쩌고저쩌고, 연락이 가고 그러면서 좀 정치판에 찍힌 것 같은데. 이 합의라는 게 원래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거는, 콜텍에서 요구했던 거는 사과. 회사 측의 사과와 국내 공장이 없어서 복직을 못 시킨다고 그러는데 국내 공장을 앞으로 하지 않겠다는 협약서를 써달라는 요구가 있었어요. 그거를 끝내 안 했고, 그냥 유감이다, 정도로 합의문을 썼고. 뭐 아주 그냥 최소한의 보상금, 말도 안 되는 보상금으로 25명 남은 조합원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던 거고요. 씁쓸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싸움이었고, 13년 정말 열심히 싸우셨다. 한국 노동사에서도 굉장히 기록될만한 그런 훌륭한 싸움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임재춘: 우리는 기타 배워도 됐어요. 배워도 됐는데 (회사에서) 너네는 기타 치지 마. 우리는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우잖아요.

 

관객1 : 회사에서 권장하는 게 아니라 아예 못 하게 한다고요?

 

임재춘 : . 딴 데 보면 우리가 기타를 잘 치는 줄 알아요. 만들 줄만 알지 칠 줄은 모르는 거예요. 사실 그걸 배워도 되거든요? 그런데 그것 못 하게 해.

 

이수정 : 노동법에 보면 근로 시간이라는 것도 제대로, 한 시간 노동하면 10분 휴식 이런 것도 제대로 잘 안 된 거고. 노동자들의 어떤, 여가를 이용해서 기타도 배우게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거가 전혀 없었고. 마지막 조율반이라고 해서 뮤지션들에게 가서 완성된 기타를 조율하고 그러는 거. 그런 사람들이 와서 좀 튕겨본 거지. 기타를 만들었던 노동자들인데 기타를 하나도 칠 줄을 모르더라고요. 그러다가 해고된 뒤에 투쟁하면서 그제서야 기타를 배워서 기타가 투쟁의 무기가 된 거죠. 재춘님이 뭐가 이렇게 매력이었나, 여러분도 영화 보시면서 좀 느끼지 않으셨나요. 제가 느낀 매력은, 재춘을 몰랐던 일반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좀 느낄 수 있도록 제가 굉장히 주안을 뒀습니다 사실은. 왜냐면, 노동 다큐를 보면 그냥 노동자들이라는 거는 어떤 전형적인 노동자들, 한 덩어리로서 표현이 되지 한 개인 개인의 모습들이 남지를 않더라고요. 근데 영화라면 한 사람의 성품과 캐릭터와 그런 것들이 다 있는 거잖아요. 정말로 다른 개성들이 있는 거고. 그걸 드러내고 싶었고, 임재춘 같은 경우에는 어떤 실수투성이 같은 면과 함께 굉장히 인간적인 따스함과. 귀엽기도 하고요, 때로는. 그런 것들이 다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마리오 : 이수정 감독님이 매력에 대해서 언급해주셨는데 동의하시나요.

 

임재춘 : 저는 잘 모르겠어요. 감독님은 어떻게 표현을 잘 해주신다 해도 우리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은 카메라만 오면 몰랐었거든요. 나중에 보니까 다 찍고 그랬더라고요. 엄청나게 감독님에게 고마울 뿐이죠.

 

이마리오 : 다음 질문받아보겠습니다.

 

관객2 :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전교조 조합원이고요. 저희 유천초등학교도 작년 830일에 혁신학교였는데 갑자기 혁신학교 지정 취소, 일방적으로 통보 받으면서 지금 천막 농성, 저항하기 시작한 지 180일 정도 되어가고 있거든요. 아까 영화 보면서 내내 몇 번 정도는 울컥하더라고요. 왜 그랬냐면, 저희가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주변에서 믿었던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말들을 많이 들었어요. 이제 피곤하니 그만 좀 해라, 또는 너희들도 사과해야 될 것 아니냐, 너희들이 피해자에게 사과해라, 이런 얘기를 비롯하여 가족들에게도 들은 얘기도 있고. 그럴 때마다 사실 마음의 상처가 더 되더라고요. 교육감한테 받은 상처보다 더 되더라고요. 임재춘님이랑 감독님도 옆에서 보셨을 때 그런 순간들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 견뎌내셨는지 노하우를 좀 듣고 싶고요. 애쓰셨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어요.

 

임재춘 : 그건 우리도 진짜 언제 다 도망가려고 했었어요. 도망가는데,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해고를 당했기 때문에 억울하다. 이렇게 오래 갈 줄 알았으면 안 했죠. 3개월에 끝내려고 했거든요. 돈도 많지. 또 엄청 많은데, 억울해서 싸웠어요. 가면 갈수록 지치는 거죠. 우리 때만 해도 진짜 서울에 모이겠다 하면 엄청 많이 모일 때거든요. 일산. 서울 어디. 행사했다 하면 많이 모이고. 그땐 그랬는데, 가면 갈수록 더 상처받는 거예요. ? 시민들이 더 싫어하더라고요. 그렇게 하면서 밴드 만들고 연극하고 예술인들도 만나고 미술 작업하고, 그게 치유가 되더라고요. 사실 억울해 가지고, 싸웠는데. 페이스북에서도 유천초등학교도 보고 안쓰럽다고 생각하는데. 사회가 아직까지도 우리들 편이 아니란 얘기죠. 자꾸 떠들어 주고,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도 하고 원래 그렇게 살았거든요, 투쟁하기 전에는. 아프면 아프다 얘기도 못 하고. 왜 니들 거리에 천막 쳐. 우리는 무조건 최초라는 말을 다 듣고 다녔어요. 그때는 대법원에서 1인 시위도 못 했었거든요. 그런데 대법원에서도 1인 시위를 들어가서 하고. 천막은 못 쳤지만 48시간 철야농성 했거든요. 그게 최초예요. 무조건 부딪혀야 조금이라도 나온다. 대법원에서도 그걸 그냥 놔뒀겠습니까. 시위 못 하게 해요. 그냥 뚫었죠. 하면서, , 그때, 막 다니면 시가 생각나요. 안 그러려고 해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서초동 점집]을 대법원 하면서 만든 겁니다. 노래도 쓴 게 세 곡이거든요. 투쟁을 재밌게 해야지, 질리다 보면 못해요. 아프면 아프다고 그 사람들을 설득을 시켜야 해요. 정부청사 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정부청사도 그 앞에서도 못 하게 해요, 공무원들은 아무도. 청와대 앞에서 집회할 때도 그랬는데요. 뭐 아무도 못 하게 해요. 지금은 더 하지. 며칠 전에 서울에서 (집회)했던 데를 돌아다녀 봤어요. 천막이 없더라고요. 민주당이 정치를 잘하나? 왜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를 안 하지? 우리는 어디를 가면은 그랬어요. 서울 12일 하고 천막 돌아다니면서 인사도 하고 우리가 노하우를 가르쳐줘야겠다, 우리가 얘기를 해줘야겠다, 했는데 천막이 없더라고요. 민주당이 정치를 잘 했구나. 속으로는 그 생각을 했지. 속으로는 으휴. 우리는 정규직이고 지금 (투쟁)하는 데는 다 비정규직이거든요. 비정규직도 어떻게 하는지를 우리가 알잖아요. 4, 5, 한 번만 더 하면 되거든요. 그러면 아프다고 얘기를 왜 못하는가. 그럼 손님들도 당연히 알게 되고. 우리 뭐 엄청나게 하고 다녔죠. 시민들이 왜 우리를 욕을 해. 그러니까 끈기로 아프면 아프다고 계속 떠들어야 돼요. 그래야 뭐라도 주지, (안 하면) 하나도 안 줘요.

 

이수정 : 지금 우리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요즘 이제 혐오 담론들 때문에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 또는 페미니즘 투쟁, 오늘 또 동물 행동 운동을 하시는 감독님도 오셨지만, 어떤 혐오 내지는 공격을 많이 받잖아요. 급진적인 운동 같은 경우에는 특히나. 당사자들끼리도 장기투쟁이 되다 보면은 처음에는 다 같이 똑같은 목표를 향해서 달려도 되고, 으쌰으쌰 하다가 길어지면서, 가족들도 그렇잖아요. 상황이 안 좋으면 서로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너는 이런 걸 안 하지. 그렇게 되면서 서로 원망하고 싸우고. 이분들도 똑같았어요. 내부 갈등이,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굉장히 힘겨울 정도로. 굉장히 곪아 터진 부분이 있었거든요. 어딜 가나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활동가 집단에서도 마찬가지고, 운동하는 집단에서도 마찬가지일 거고. 어디나 다 문제가 돼요. 그리고 또 처음에는 몇 달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이기고 올라왔거든요. 정리해고는 무효다, 이랬는데 뒤집혔던 재판이잖아요. 그렇게 길어지다 보니까 이제 그만, 계속 그러고 싸우느냐. 딸들도 마찬가지고. 집에 있는 친척들도. '너 그 시간에 어디 가서 딴 일 하면 최소한 밥은 먹고 살고 빚은 안 지고 살 텐데 왜 그러고 있냐.' 다들 미친 짓 한다고 이렇게 이해를 못 해주고. 그럴 때 가장 힘들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투쟁 과정에서 이혼을 하게 되신 분도 있고. 사실 그런 것들이 모든 투쟁이나 이런 것, 궤도를 벗어난 것을 하려고 할 때 누구나 부딪히는 어려움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옳은 거니까. 이게 옳은 길이니까 하지 않았나. 그리고 시작한 거니까. 도망갈 타이밍을 놓쳐서 도망가지 못했다고 늘 말씀을 하시는데 그럴 수도 있죠. 도망갈 타이밍을 잘 맞춰서 영리한 사람들은 일찍 제 살길을 찾고. 그럴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 이렇게 또 바보같이, 우직하게 오랫동안 한 해 한 해 이렇게 하다가 13년을 같이, 이렇게 살아오신 분들도 있고. 그래서 저는 사실 노동자들의 투쟁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인생 살다 보면 어떤 일을 하든, 내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어떤 선택이라는 걸 하고 꼭 내 의지만으로 선택하는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냥 타자에 의해서 끌려갈 수도 있는데, 자기도 몰랐던, 예기치 못했던 시간을 살게도 되고. 불행하다 행복하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냥 그 매 순간 매 순간이 삶이 아닌가. 그리고 삶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될까. 이제 콜트-콜텍분들 같은 경우에 굉장히 힘겨운 시간이지만 재미나게(웃음) 연극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시도 읽고 영화도 찍고. 그렇게 시간들을 보냈기 때문에 다른 감각, 다른 경험들을 하면서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마리오 : 콜트-콜텍은 어떻게 보면 좀 특별한 케이스였던 것 같아요. 악기를 만드는 회사였고, 음악, 기타를 만드셨던 분들이 음악인들, 뮤지션들이 직접 연대를 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음악인만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예술인들이 같이하게 됐다. 그게, 그러면서 그 힘이 13년까지 올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힘들 중 하나지 않았을까 추측이 좀 되는 것 같아요.

 

관객3 : 안녕하세요 저는 유천초 분회 회원이었다가 유천초 투쟁으로 인해서 징계를 받고 지금은 휴직 중이고 도교육청 천막 농성을 하고 있는 당사자입니다. 우선 저는 질문은 아니고요, 사실 제가 이 자리에 못 올 뻔했었어요. , 죄송합니다.

페북 친구 요청 받아주셨으면 좋겠고요. 제가 영화를 보면서 힘을 너무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저희 투쟁은 180일 정도밖에 안 됐어요. 근데 4,400일이라는 이 믿기지 않은 숫자를 보면서, 그리고, 옳으니까 끝까지 할 수 있었다는 그 말씀이 힘이 많이 됐고. 저희는 사실 보면서 조금 부러웠던 거는 민주노총에서 도와주신 거잖아요. 함께 하신 거잖아요. 저희는 전교조라고 하는 조직에서 저희 일에 관여할 수 없고 함께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저희는 시민단체들과 함께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영화에 저희와 함께하는 분들이 나오시는 거예요. 그런 훌륭하신 분들이 저희와 함께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너무 감사하기도 하고요. 또 이런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셔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다는 생각, 감히 저는 정규직이고 해고라는 그런 엄청난 일을 당한 노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저희도 억울해서 시작했거든요, 천막 농성을. 근데 도교육감도, 도교육청에 있는 도교육감이 항상 뒷문으로 다니는 것도 너무 똑같고, 저희랑 면담할 때 눈 감고 있었거든요. 눈 감고 팔짱 끼고 있더라고요. 같은 조합원들에게 질타를 많이 받고 있고. 저희가 저희 얘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없어요. 하지만 저희를 믿고 옳다고 지지해주시는 동지들 계신데 감사드리고. 이 영화를 통해서 저희, 사실 제가 영화 보는 게 너무 미안했거든요, 언니들한테. 저랑 같이 징계받은 언니들은 지금 도교육청 천막에서 오늘 밤을 또 자요. 저는 아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주는 아이가 있어서 자진 않고 왔다 갔다 하는데 오늘 제가 혼자 간다고 언니들이 오지 말라고 해서 제가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거 거든요. 그래서 언니들한테 사실 너무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하지만 이 감동을 제가 언니들에게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투쟁을 알고 계시는 것에 너무 감사드려요. 너무 고맙습니다. 좋은 영화 잘 봤습니다.

 

임재춘 : 학교 문제도 우리가 엄청나게 얘기를 하고는 했지만은 어떻게 풀지를 모르겠어요. 과연 문재인이 대통령이 됐는데, 저희는 노무현 말기 때부터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까지 싸웠거든요. 싸우다 보면 누가 와줍니다. 힘내시고 누가 와도 알리고 다니고. 힘내시고 파이팅 하십시오.

 

이마리오 :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계신 주변에 저희들이 할 수 있는 뭔가들은 계속적으로 고민하긴 해야 되지만, 사실 다들 지금 코로나부터 시작해서 처한 상황들이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전보다 연대하는 활동들이 조금 더 위축되어 있는 느낌이 없지 않아 좀 있는 것 같아요.

 

관객4 : 안녕하세요. 저는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임재춘님을 너무 오랜만에 뵙습니다. 질문이 하나 있고, 그냥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저는 아까 봤던 끝장투쟁을 할 때 즈음부터 그때 당시에 다른 해고자들이었던 쌍용자동차 분들이랑 같이 활동을 노조에서 하게 돼서, 같이 활동을 하면서 여러 경험들을 하고 끝장투쟁에 들어가신다는 얘기를 듣고 농성장에 여러 번 방문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그래서 뒷부분을 보면서 아는 얼굴들도 너무 많이 나오고, 사실은 잊고 지냈던 분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강릉에 내려오고 얼굴들을 많이 못 보니까 뵙는 분들만 뵙는데, 영상으로만 뵙게 되어서 너무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까 임재춘 선생님께서 만족스럽지 못한 마무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는데, 사실 저는 투쟁해주시는 동지들이 갖고 있는 아픔과 다르게 활동가로서 그 공간에서 같이 사람들이 많이 성장하고 있다. 그 사람들도 그 공간 안에서 사회를 배우고 있다는 얘기를 꼭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개인에게 합의가 너무나도 잘, 너무나도 협소하게 합의가 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해고자 동지들이 합의를 하고 나면 더 많이 공허함과 우울함을 느끼시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정말 안타까운 부분이 있지만, 이제 그 해고자 동지들께서 해주셨었던 투쟁의 어떤 한 결실을 그 공간에서 함께 했었던 동지들 마음속에서 그 공간을 함께 하면서 배우고 성장했던 그 시간들을 계속 가지고 있다는 거.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비슷한 맥락이긴 한데 아까 나눠져서 각자의 투쟁을 하며 살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말로 근황이 궁금했거든요. 제가 이제 쌍용자동차분들도 복직을 하시고 나서 더 많이 마음이 외로우신데 이제 복직을 하셨으니까 하소연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고. 그래서 <재춘언니> 영화가 올라오는데 너무나 반갑고, 어디서 어떻게 지내실까 이런 생각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그 농성장에서 뵀던 분들이. 근황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직 교섭은 끝나고, 길거리에서 하는 투쟁은 끝났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삶의 투쟁 같은 것들이 이어진다 생각을 해서 아까 전에 각자 투쟁하면서 산다고 얘기를 하신 것 같아서 그런 맥락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좀 듣고 싶습니다.

 

임재춘 : 네 명이 하잖아요? 한 분은 중간에 가시고, 이인근 조합원은 딸기 농장을 운영하고 있고요. 저는 건설 용역을 하다가 힘이 달려서 아파트 경비직을 하고 있습니다. 김경봉 조합원은 비정규직 쉼터 꿀잠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 번은 건설 현장에 갔는데, 계약직 여성을 봤는데. 은행에 들어간 애들이 있어요. 아저씨는 테레비도 많이 나오고 했는데 장사라도 하시지.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요즘 삶이 어떠냐고 했더니, 우리는 아저씨처럼 투쟁 한 번도 못 하게 한 거 같다고. 지금 정국을 어떻게 생각하냐. 그런 거 한 번이라도 얘기하면 잘라버린다는 거예요. 투쟁의 역사도 있지 않냐, 그러면 나 사려야 돼. 요즘에는 제 친구들이 이 영화를 봤거든요. , 고생 많이 했다. 내가 니들 앉혀주고 한번 떠들어 줄게. 여자 대통령이라고 박근혜 때 선거운동 했던 애들이에요. 이제 자식들 보고 느끼는 거예요. 이제 나이가 먹었으니까 50대 됐는데. 사회가 가면 갈수록 흔들리잖아요. 그때 왜 안 싸웠지? 이런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 영화 하나에 친구들에게 용기가 생기고. 이게 인생살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수정 : 국민학교 친구분들이 오셔서 펑펑 울다 가셨어요. 너 정말 고생 많았다. 박근혜 찍는 보수, 그런 분들인데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고요. 정작 사회가 그렇게 되는 거 같아요. 80년대 군부정권 때는 적이 확실하고 백만 명이 시청 광장에 모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자본과 전지구적인 글로벌 자본주의, 자본의 시대에서 살아간다는 거는 그냥 잘리지 않기 위해서 순응하면서 겁을 주잖아요. 너네 조금만 잘못하면 못 살아. 이렇게 겁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서 끽소리 안 하고 있는 자리에서 안주하면서 살려고 하는데, 이런 저항의 경험, 투쟁의 경험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그 투쟁의 과정 속에 연대하는 분들도 덩달아 성장하는 것이고, 어떤 투쟁이든 그런 경험은 되게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그 뒤에, 아까, 합의한 다음에 합의식 할 때 밖에서 임재춘 동지랑 껴안는 여자분이 있잖아요. 따님이 아니라 그분도 대학교 강사인데 그 대학도 마찬가지고. 거대한 벽이잖아요. 혼자 외롭게 1인 시위를 매일 하고, 재춘언니랑 친해져 자주 연대 오고 하셨던 분이에요. 그분도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런 장면이 연출이 됐던 것 같고. 또 짜라투스트라 낭독을 할 때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에서 활동을 하셨다고 하니까 그때 왔다 갔다 하던 대학생 한 분이 그런 과정 속에서 성장해서 활동가가 됐거든요. 인권네트워크 바람에서 활동하고 있고. 그런 여러 활동가들도 키워내고, 그러니까 싸우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그 사람이 저는 디퓨저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가. 지금은 좀 힘들고 주변 사람들이 인정, 이해를 못하더라도 예수는 뭐 안 그랬나요. 그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 돌 맞고 그런 사람이었던 거잖아요. 일제 강점기 때는 또 안 그랬겠어요. 일본 제국이 완전히 영원하리라고 생각하고 친일을 했던 거잖아요,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지만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있는 거처럼 지금 노동자들 투쟁, 어디선가 싸우고 있는 분들이 다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마리오 : 시간이 많지가 않아서 마지막 질문 한 분만 더 받겠습니다. 없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질문을 굉장히 많이 준비해서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면, 두 분께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임재춘님 같은 경우에는 투쟁 현장에서 음악을 만드시고 글을 쓰시고 영화를 찍으시고 어떻게 보면 예술가로서의 활동들을 투쟁하시면서 같이 하시게 됐다는 것도, 그런 경험들이 있어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이수정 감독님 다큐멘터리라는, 하지만 관객이 별로 오지 않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예술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예술영화같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렇게 보자면 좀 광의의 의미의 예술이라는 게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나 힘이 되는 걸까요? 먼저 경험하신 임재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임재춘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노래도 못 했고. 기타를 만들 줄만 알았지 이걸 어떻게 치는 줄을 몰랐었거든요. 사실 그걸 알리는데, 우리 투쟁을 알리는 데 7년 이상 걸렸어요. 우리 투쟁 알리는데. 맨 처음에는 문화연대가 왔고, 그게 3년 만인 것 같거든요. 왔는데, 잘 안 알려져요. 사실 우리 같은 경우는 중소기업이잖아요. 대한민국은 큰 기업만 알지 작은 기업은 몰라준다. 그러니까 우리가 행사를 잡잖아요. 그럼 큰 공장에 가자고 그래요. 그럼 큰 공장에서는 안 된다고 그러는데, 그럼 우리는 뭘 해도 안 되는구나. 우리가 탄압을 하는 거죠, 스스로. 밴드 만들어 갖고 노래 불러주면 기타 하나로다가 국민들이 볼 수가 있고 재밌게 하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못했을까. 우리가 연극을 하는 것도 다 안 될 때 한 거거든요. 음악도 이제 끝났고. 그럼 연극을 한 번 해보자. 그래서 연극을 하게 된 거거든요. 9일만 한 번 해보자. 9일만 해보려 했는데 그것도 앵콜 공연을 해갖고, 22일인가 했는데 회마다 매진이 됐었어요. 기자들도 붙고, 저는 KBS MBC 필요 없다 그랬어요. 우리는 너무 많이 알려졌으니까. 그럼 MBN YTN 기자들을 붙잡았죠. 안 내도 좋다, 자막만 넣어달라. 그래도 박영호는 안 나왔었어요. 그 다음에도 가서 3일인가 5일인가 올라갔었는데, 아무것도 안 갖고 빈손으로 온 거예요. 그거 때려죽이지도 못하고. 뭐라도 갖고 올 줄 알고 했거든? 그래도 아무것도 안 나왔어요. 예술인들이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온 박영호. 투쟁하는데요, 무조건 하셔야 돼요. 누가 하자 그러면 오냐 하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알려져요. 우리 7년 그때까지 아무도 안 알아줬어요. 우리는 뭐 하면 맨날 뺏기고, 그래도 맨날 연대 가야 되고. 그렇게 했습니다.

 

이수정 : 예술이 뭐, 특별한 어떤 예술가들만이 하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예술적인 측면을 만들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이라는 거는 주류적인 가치, 모두가 옳다고 믿는 사회에서 이렇게 살아야 돼. 이렇게 가르치는 가치를 그대로 쫓는 게 아니라 그런 거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능력, 다르게 표현하고 자기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그런 게 예술 아닌가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투쟁도 예술처럼 하는 게 좋겠다라는 생각합니다, 왜냐면 계속 판에 박힌 진부한 방식 다는 예술적인 방식으로 투쟁의 시간도 삶이고 굉장히 귀중한 시간들이기 때문에, 투쟁하는 당사자들도 예술적인 방식의 투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자기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크게 당장 바뀌진 않겠지만, 조금 조금씩 바꿔 나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마리오 : 이제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듣고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임재춘 : 맨날 하는 얘긴데요. 사실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우리는 알고 있어요. 근데 시민들이 안 따라 주시더라고요. 맨 처음 시작할 때 선전물 드리면 안 받아요. 노래라도 불러주면 그제서야 받더라고요. 지금은 서울 쪽 가면 주면 많이들 읽어봐요. 그렇게 부딪히며 했는데 아무도 안 읽는 거야. 이걸 내가 왜 받느냐고. 침을 탁 뱉고 가는 사람도 있고. 왜 우리 가는 길에 천막을 쳐놓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엄청 싸웠어요, 시민들하고. 싸우면서 아저씨, 이거 잘못된 거 아니냐. 그때 KBS 뉴스 한 번 나오고, MBC 뉴스 나오고 하니까 콜텍 저놈이 저랬어? 매스컴에 한 번씩만 나오면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래서 투쟁을 하셔도 열심히 매스컴을 불러 갖고 기자들한테 써달라고 하고. 철저하게 계획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어요. 무조건 국회의원 만나면 얘기 들어달라고 하고 악착같이 해야 해요. 우리가 두려울 게 뭐 있습니까. 잃을 거 하나도 없어요. 시민들은 신경 안 써요. 윗사람들은 무시하고 귀 막고 있죠. 무조건 따지고 다녀야 돼요. 왜 이 얘기 안 해주냐, 해달라. 그러니까 13년이 걸렸죠. 우리는 안 해본 게 없거든. 예술인들 만나서 이런 것도 해보고. 그것 때문에 많이 알려졌어요. 사람 많은 데 가서 하는 게 제일 좋아요. 항상 얘기하지만, 맨날 아프다고 얘기해야 하고. 학생들한테 말하는 게 빠르거든. 학생들 싫어하죠. 대학교 가서 우리 얘기 해달라 얘기하면 효과가 있어요. 투쟁 방법도 우리 같이 재미있게 하셔야 안 지쳐요. 이 얘기를 꼭 해주고 싶었어요.

 

이수정 : 저는 아무래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까, 강릉독립예술극장도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이잖아요. 이런 독립예술영화가 계속, 여러분들 늦게까지 자리 지켜주고 계신데, 여러분들처럼, 여러분들 같은 관객이 점점 더 많아져서 독립예술영화가 계속 더 만들어질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관객 운동을 좀 해주셔야 하지 않나. 그리고 <재춘언니>를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네이버 이런 데에 별점도 매겨주시고 한줄 평도 써주시면 되게 좋을 것 같고요. SNS 하시는 분들은 여러분들이 알려 주시고, 그런 작은 행동부터 관객 운동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늦게까지 자리 지켜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이마리오 : 감독님이 하신 이야기를 제가 하려던 얘기였는데요. (웃음) 늦은 시간까지 자리 지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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