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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랍게> 리뷰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김순악의 언어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3. 4.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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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랍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김순악의 언어

 

<보드랍게>는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기존 작품들과 달리 주인공 김순악의 위안부피해 사실이나 인권 운동가로서의 모습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김순악이 그 사이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주목한다. 그의 시간은 애니메이션, 희움 활동가들의 인터뷰, 아카이브 영상, 증언 낭독으로 재구성된다. 영상 자료가 없는 과거는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하고, 김순악의 증언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로 전해진다.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가며 그의 궤적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김순옥, 김순악,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츠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할매, 순악씨. 82년 생애 동안 김순악에게 붙여진 이름들이다. 영화는 김순악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본인의 이름을 쓰는 장면에 위의 이름들을 호명하는 내레이션을 덧입히면서 시작된다. 희움 활동가들은 김순악이 강단 있고 강퍅하며 무뚝뚝하여 누구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성격을 지녔다고 이야기한다. 이어서 김순악은 하이고, 참 애 묵었다이렇게 보드랍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음을 털어놓는다.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김순악의 지난 세월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랬던 그는 문을 열어 세상을 향해 소리쳤고 후손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 재산을 기부한다. 그의 용기는 어떻게 싹텄으며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피해자 김순악에서 한 발 나아가 인간 김순악에 도달하는 여정을 떠나본다. 김순악은 대구의 실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동네 아저씨의 말을 믿고 만주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일본군 위안부생활을 한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 유곽과 전라도의 요릿집에서 일하고, 색시 장사와 식모살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김순악은 광복 이후의 삶이 더 힘들었다고 증언한다. 1년 남짓한 위안부생활이 그의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순악은 사람들과 통하는 데가 없다. 남자들이 참 싫다고 말하는데 어느 순간 현시대 여성과 김순악의 목소리가 겹친다. 그리고 김순악의 증언 글을 읽던 현시대 여성들이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다. 김순악의 궤적은 지금의 우리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김순악의 증언을 전하던 여성들은 미투 운동가이다. 김순악은 또 다른 위안부피해자인 훈이 할머니와 이용수를 통해 용기를 냈고 미투 운동가들은 김순악의 행보를 보며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발할 용기를 얻었다. 스쿨 미투 운동가는 공감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결책을 함께 모색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됐다고 한다. 또 다른 미투 운동가는 과거의 김순악이 그랬듯, 왜 이런 일을 당했는지 자책했었지만 이젠 가해자 잘못이라는 것을 안다고 전했다.

 

위안부피해와 전시상황은 김순악이 사소한 자극에도 쉽게 놀라도록 만들었고 술과 담배 없이는 살 수 없게 했으며 우울증과 불안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훌훌 털 수 있었다. 자신에게 고생했다고 토닥여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참 애 묵었다고, 보드랍게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거기서 더 나아가 김순악은 나비가 꽃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듯이 모든 사람은 다 똑같다고 말한다. 나 하나 죽어가 나라가 잘되면 좋겠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며 평화라는 글자에 꽃을 붙여 압화 작품을 만들었다.

 

김순악이 별세한 지 12년이 흘렀다. 그의 언어는 여전히 유효하다. 한반도의 성폭력 피해자는 지금도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사람들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기는커녕 2차 가해를 하느라 바빠, 피해자가 성폭력으로 인해 이후 삶에서 어떤 영향을 받을지 고민할 겨를이 없다. 한반도 너머 여러 국가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아직도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다. 김순악의 삶이 전하는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까지 묵직하게 다가온다. 평화 압화는 간절히 호소한다. 폭력을 멈추고 전쟁을 끝내라고.

 

-관객 리뷰단 박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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