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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의 하루> 리뷰 : 익숙함에 지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1. 12. 2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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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의 하루>

익숙함에 지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소설가 구보의 하루>는 박태원 작가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특별한 사건과 자극적인 상황 없이 구보(박종환)라는 인물이 보내는 하루 동안의 외출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전반에 걸쳐 펼쳐진 느리고 느슨한 구성은 구보의 하루를 차곡차곡 담아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구보가 아침을 맞이하고 밤의 거리를 거닐 때까지 카메라는 그저 묵묵히 구보의 보폭에 맞춰 따라가고 있다. 구보가 가는 길을 비추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은 자연스레 구보에게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카메라에 담긴 구보를 통해 관객에게 임현묵 감독이 1930년대의 인물을 현시대에 불러들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기와지붕으로 둘러싸인 자그맣고 네모나 마당이 부감으로 나타난다. 이어진 장면에서는 책상에 앉아 원고지의 마지막 장에 ''이라는 단어를 쓰는 구보의 손과 옆얼굴을 비추고 있다. 한옥은 구보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타이핑으로 문서를 작성하는 지금 시대에 육필 원고를 고수하는 순수문학 작가 구보의 아집은 한옥이 풍기는 고풍적인 자태와 닮아있다. 신식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도심 한가운데에서 옛 모습 그대로 유지하는 한옥처럼 구보는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살아가려 애쓰지 않는다. 찍은 사진을 즉시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 대신 현상할 때까지 찍힌 결과물을 알 수 없는 필름 카메라를 선호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세상의 변화와 구보의 보폭 사이의 속도 차는 세상과 구보 사이의 간극을 나날이 벌려 놓는다

 

구보는 자신이 달라지는 세상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는 듯 그의 작업과 생활 형식을 기존의 방식을 방패 삼아 우직하게 지키고 있다. 익숙함으로 무장된 구보의 일상은 구보가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구보가 외출한 목적은 신작 소설을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으려는 데에 있다. 그러나 구보와 만난 인물들 중에 구보의 작품을 보려는 이가 없다. 편집장 기영(김경익)은 구보가 건넨 원고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잔만 기울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이몽(류제승)은 구보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천고 끝에 연극을 무대에 올린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구보가 소설을 보여주려 했던 혹은 보여줄 의향이 있었던 인물들은 구보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시대에 팔리지 않는 순수문학과 육필 원고를 고집하는 구보의 의지를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 우매함으로 폄하한다.

 

연이은 퇴짜와 거절 그리고 은근한 무관심과 무례한 상황에 놓이는 과정 속에서 점차 지쳐가는 구보의 모습은 너무도 안쓰럽다. 골목의 작은 식당에서 홀로 술을 기울이는 구모는 소주를 한 모금 삼키는 것마저 힘겨워 보인다. 좌절과 수치로 인해 감정이 요동치고 있을 테지만 구보는 속에 쌓인 감정의 응어리를 내뱉지 못한다. 구보가 성곽길에서 생각에 감겨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을 때 그의 고뇌를 방해하듯 관광객으로 보이는 일본인 여성 두 명이 그녀들의 소원(멋진 애인을 만나게 해 달라는)을 크게 외친다. 구보는 그녀들을 따라 크게 고함을 지르려 하지만, 그가 벌린 입에서는 짧은 탄식만 나올 뿐이다. 구보가 질러내지 못한 고성 대신 구보가 내뱉는 담배 연기가 그의 감정을 표현하듯 느껴진다. 흑백 화면에서 느껴지는 늦가을의 한기는 구보의 한숨 섞인 담배 연기와 뒤섞여 구보가 지나온 나날에 대한 권태와 답답함을 드러낸다.

 

구보의 삶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이 느껴지려 할 때, 영화는 의외의 장면에서 돌파구를 발견한 구보를 조명한다. 구보가 술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술집 밖으로 나온 이몽의 후배이자 연극배우 지유(김새벽)이 구보 옆에 서서 함께 담배를 피운다. 곧이어 지유는 구보의 전작에서 읽었다는 문구를 암송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 설렘과 기대를 준다. 이미 익숙해졌다면, 그 익숙함을 지우려 노력해야 한다.”

 

이 문장을 듣고 난 구보의 표정에서 후련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구보는 곧장 익숙하지 않은 것과 마주한다. 기영이 제안한 자서전 대필 의뢰를 받아들이고 난 후, 마로니에 공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전 애인 수연(정민결)을 뒤로한 채 혜화역을 향해 걸어가는 구보의 뒷모습이 처음으로 산뜻하게 느껴진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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