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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 리뷰 : 함께 짊어지기 위한 싸움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0. 4. 8.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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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

함께 짊어지기 위한 싸움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로드무비가 지닌 장점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한 것 같다. 차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은 자매들의 대화에 집중하게 한다. 대화 중에 인물의 말투나 제스처로 그들의 상황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이런 장치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 말하는 것보다 차 안의 분위기가 인물들에 이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차의 기동성을 활용한 장소의 전환과 함께 장면이 주목하는 인물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도 이 영화의 장점이다.

 

첫째 혜영(장리우)은 육아휴직 후 퇴직을 권고받은 싱글맘이다. 게다가 '보통이 아닌' 아들 키우고 있다. 혜영이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그녀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내 느껴진다. 둘째 금옥(이선희)은 바람을 피우는 남편의 불륜 증거를 모으는 중이다. 신호를 기다리던 중 속옷 가게 안의 남편 발견하는 장면에서 금옥의 계획이 조금은 유쾌하게 드러난다. 셋째 금희(공민정)는 결혼 준비로 자금난을 겪는데 예비 신랑은 영 미덥지 못하다. 배 안에서의 남편과의 영상 통화 장면에서 금희가 처한 현실의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넷째 혜연(윤금선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회에 화가 많이 나 있다. 대학교 게시판에 "학내 성폭력 피해자 네크워크"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성해방운동가의 면모를 느끼게 한다. 막내이자 집안의 장남 승락(곽민규)은 가족들과 연락을 끊은 채 반지하 원룸에 숨어 지내고 있다. 그리고 SNS로 수소문하여 본인의 거처를 찾아온 누나들에게 전 여자친구를 임신시키고 잠적한 사실까지 들켜버린다.

 

사는 게 만만하지 않은 이 다섯 남매가 시골집에 모이면서 영화가 풀어내고자 하는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들이 한데 모인 이유는 아버지 묘 이장문제 때문이다. 무덤을 파헤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내용이다. 그렇기에 죽은 이와의 추억을 떠올린다거나 안쓰러워하는 등의 뭉클한 감정을 중심으로 장면을 그려내도 충분한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보다 무덤을 파헤치고 나서 그 후속 조치에 대한 이견의 팽배함에 주목하고 있다. 큰아버지와 승락이 한 편이 되어 나머지 네 자매와 이 문제로 대립구조를 이룬다.

 

시골집에서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시신을 땅에 묻느냐 태우느냐의 논쟁은 딸들이 그동안 받아온 차별에 분노하고 설움을 표출하는 것으로 번져 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바탕 싸움이 끝나고 나서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장면이 나온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다섯 남매가 하나둘씩 방에서 나와 처마 아래에 모인다. 비 오는 소리와 함께 한밤중의 어둑함이 만들어내는 이상한 포근함이 이들 남매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양 끝에 앉은 첫째 혜영과 막내 승락은 무덤덤하게 서로를 걱정한다. 살가운 말이 오가지는 않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형제들에게 의지하고 기대라는 애정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장면이다.

 

영화는 책임을 한 곳에 몰아버린다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폭력적인 처사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다섯 남매가 각각 감내해야 하는 장남이라는 부담감과 장녀의 무게, 그리고 여자로 태어나 겪는 억울함을 평범한 일상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한 집안의 주인을 남자로 내세우고 그 아래에 여자를 두는 것과 같이 평등하지 못한 관계는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만들어진 불합리한 제도이다. 개선이 필요한 이 제도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이장이라는 문제를 통해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있을법한 이야기로 드러낸다.

 

시대의 변화함에 따라 과거의 것들은 당연히 변화의 시기를 거쳐야만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가복음 914)는 성서의 한 구절처럼 새 시대에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제도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리라는 희망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낀다. 강을 가로지르는 도로 위에 혜영의 차가 달린다. 차 안에는 모두가 함께 있다. 끝없이 펼쳐진 긴 도로의 마지막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함께 한다면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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