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휴먼 보이스> 리뷰 : 나를 지키기 위한 파괴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1. 9. 2. 15:12

본문

<휴먼 보이스>

나를 지키기 위한 파괴

 

<휴먼보이스>는 여자(틸다 스윈튼)가 존재하는 공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세트임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카메라가 부감으로 찍은 여자의 아파트 내부는 외부골조가 전부 드러나도록 촬영되어 있다. 여자가 베란다에 서 있는 장면에서 외부 전경은 촬영 스튜디오의 진회색 벽으로 꽉 차 있다. 심지어 여자는 아파트 세트를 벗어나 그 앞에 놓인 의자에 앉기도 한다. 연극이나 촬영을 목적으로 지어진 세트는 그 쓸모를 다하면 철거가 된다. 영화는 이러한 세트의 속성을 여자의 공간에 그대로 대입한다. 여자가 연인과 함께한 공간에서 연인이 떠나버렸다. 공간은 더 이상 여자가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자는 연인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상태이다. 그로 인해 영화는 실연(失戀)이 만들어 낸 처연함으로 휘감겨 있다. 여자는 상처받은 마음을 물질을 파괴함으로써 드러낸다. 베란다에 선 여자의 부들부들 떨리는 뒷모습에서 돌아오지 않는 연인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 이내 여자는 손에 든 와인잔을 내려쳐 깨부수고 철물점에서 구매한 도끼로 침대 위에 놓인 연인의 정장을 내리친다. 그리고 여자는 13알의 알약을 입에 털어 넣고 술과 함께 삼킨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시도를 할 만큼 그녀의 분노는 극단적인 지경에 이르러 있다. 영화는 여자가 표출하는 과잉된 분노가 여자가 공간(세트)을 파괴할 가능성으로 전환되도록 서사를 진행한다.

 

영화의 서사는 오롯이 여자의 음성과 행동만으로 진행한다. 30여 분의 상영 시간 중 거의 대부분이 여자가 연인과 통화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자가 연인과 통화하는 동안 연인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오직 여자 한 사람이다. 때문에 관객은 자연스레 여자의 대사와 표정, 목소리의 떨림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녀의 음성을 통해 그녀가 연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전달받는다.

 

그리고 영화는 여자가 착용한 의상의 색감을 통해 변화하는 그녀의 감정과 상태를 탁월하게 나타낸다. 그중 도입부에 여자가 착용한 의상은 가장 우아하고도 애처로운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여자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그녀는 붉은색 벨라인 드레스를 입고 있다. 홀로 스튜디오의 이곳저곳을 거닐던 그녀는 잠시 후, 붉은 벨라인 드레스를 모두 덮을 만큼 품이 큰 검은색 외투를 걸치고 있다. 여자는 마치 타다 만 장작처럼 보인다. 그녀는 아직 사랑이라는 뜨거운 감정으로 가득한데, 그 위를 뒤덮은 이별이라는 黑沙(흑사)로 인해 불완전한 燃燒(연소)를 당한 상태이다. 창백한 여자의 얼굴에 불안과 초조가 가득하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여자에게서 비참함이 느껴진다.

 

영화의 초반에 도끼를 구매할 때에 착용한 (스산함이 느껴질 정도로 진한) 파란색 정장을 제외하고, 여자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붉은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떠나간 연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여자의 복장은 새빨간 코듀로이(Corduroy) ·하의다. 그리고 3일 만에 연락이 온 연인과 통화하는 그녀는 붉은색 가운을 걸치고 있다. 연인을 향한 여자의 열렬한 사랑이 의상에 담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매우 무례한 연인의 마지막 인사를 기점으로 여자는 붉은색 의상을 벗어 던진다. 가죽 재킷과 화려한 무늬의 노란색 상의를 입은 여자에게서 이전의 불안과 초조는 느껴지지 않는다.

 

여자는 연인과 함께한 공간에 불을 붙이고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간다. 여자에게 인장처럼 붙어있던 붉은색의 기운은 불꽃이 되어 공간을 완전하게 태워 없앤다.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던 습기를 가득 머금은 듯한 불쾌한 처연함은 사라지고, 대신 마구잡이로 분출되는 분노가 차차 냉각되면서 발생한 냉철함이 영화에 감도는 분위기를 주도한다. 여자는 연인에게 취해있을 때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자신의 존엄을 감정의 열기가 빠져나가는 순간 발견한다. 스스로를 위해 사랑에게서 벗어나는 선택을 한 그녀의 뒷모습에서 너무도 당당하여 아름답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