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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리뷰 : 절제된 폭력과 사랑의 미학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1. 5. 3.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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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절제된 폭력과 사랑의 미학

 

격발된 총알은 딱 네 발, 그 흔한 자동차 추격 신도 없고 벼랑 끝만 골라 다니며 주먹을 주고받는 치열한 격투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영화가 친절하지도 않다. 등장인물은 많고 그에 반해 대사는 많지 않은데, 그 많지도 않은 대사에 어찌나 이름을 불러 대는지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도 어렵다. 그것도 어떨 때는 이름만을, 또 어떤 때에는 성만을 부르고, 또 어떤 때에는 풀 네임을 부른다. 한술 더 떠서 과거 회상이 불쑥불쑥 들어와서 시간의 흐름마저 뒤죽박죽이 된다. 스파이물에서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커 보이는 영화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국가의 기밀을 적대국에 넘기는 그 두더지가 누구인지를 쫓다 보면 127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 후딱 지난다. 결과는 분명하게 나오고 그다음 남는 것은 찜찜함이다. 왜 그가 두더지일 수밖에 없는지, 내가 어떤 연결고리를 놓치고 있었는지 복기해보고 싶은 강한 욕구가 샘 솟는다. 그렇게 영화는 아예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본 사람은 없을 것 같은 영화가 된다.

 

일단, 등장인물의 풀 네임을 정리하고 그들이 각각 팅커, 테일러, 솔저, 푸어맨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만 잘 기억해두면, 그들의 역학관계와 스토리가 밀도 있게 다가온다. 이제 영화의 전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덤으로 곳곳에 숨겨둔 암시와 상징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까지 다다르면, 이 영화가 한 신 한 신 군더더기 없이 찍어내면서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촘촘히 담아냈는지 감탄하게 된다. 그 예로, 조지 스마일리(게리 올드만)가 두 명의 팀원과 합류하여 본격적인 임무 수행을 시작하는 장면에서, 차 안에 벌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그들을 귀찮게 한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이들은 그 벌을 귀찮아하면서도 그냥 손을 휘휘 저어서 쫓기만 한다. 이에 반해 조지는 그 벌을 유심히 지켜보며 섣불리 반응하지 않고 벌의 움직임에 시선을 따라간다. 그리곤 적절한 타이밍에 창문을 살짝 열어 손 한 번 안 대고 간단하게 벌을 차 밖으로 날려 보낸다. 이것이 조지의 성향이며 이번 일의 처리가 바로 그렇게 될 것임을 간명하게 암시한다.

 

이렇게 중요한 암시를 던지는 장면에 할애한 시간은 불과 20. 빌 헤이든(콜린 퍼스)이 조지의 아내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은, 고작해야 신발에 채 들어가지 못한 그의 발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사한다. 그렇게 11초를 아껴 만든 영화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는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까 의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파티에서 배우들이 보여준 눈빛과 몸짓이 결국에는 그들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암시하며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물리적인 시간 배분의 셈법에 수긍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장치들을 발견해내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되니 마치 영화 속 보물찾기라도 하는 기분이 된다. 이러한 부분들은, 제법 많은 분량의 소설 원작을 영화에 담는 데 있어서 과감한 생략과 영화적 표현으로의 대치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도 평가받을 수 있으리라. 동시에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의 의도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배우들의 개성 넘치는 연기력도 큰 요소였을 것이다.

 

영화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거의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흔히 스파이물에서 관객들의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는 것은 목숨을 건 침투나 잔인한 살인 장면, 또는 끔찍한 고문과 피가 낭자한 대결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 주검이 되어있는 장면은 보여줄지언정 폭력의 장면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결코 무색무취의 그저 그런 영화가 아니다. 극도의 긴장감과 몰입감은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추리의 회로를 돌리고 다음 장면을 예상하게 만듦으로써 끌어낸다. 마지막에 두더지를 밝혀내는 장면에서조차도 총성이나 격투 하나 없이도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며 과연 누가 덫에 걸려들지 도무지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끔찍한 폭력이 없이도 얼마든지 관객을 긴장시키고 영화의 밀도를 높일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와 더불어 영화에는 제법 다양한 사랑의 감정선들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매우 절제된 형태로 표현된다. 그 사랑의 눈빛과 몸짓들은 절제되어 있어서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고 아름답다.

 

마지막 엔딩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사살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 그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이, 돌아오지 못할 연인을 기다리는 이, 지나버린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이, 그리고 아내가 돌아오고 국장의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옛 동료는 모두 떠난 이의 모습을 연달아 보여주는 장면은 마지막까지 담백하게 묘한 아름다움과 여운을 남긴다. 더불어 이 장면에 흘러나오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La Mer'는 굉장히 이질적이면서도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원작과 더불어 몇 번이고 보고 싶을 영화라고 굳이 사족을 붙여본다.

 

-관객 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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