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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철> 리뷰 : 슬픔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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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1. 2. 26.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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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철>

슬픔을 찾아서

 

영화의 후반부. 영남(염혜란)은 사라진 은영(박지후)을 찾아 헤매다 2년 동안 의식불명이었던 남편이 의식을 되찾았다는 연락을 받는다. 은영을 잊어버린 채 영남과 희주(김시은)는 차를 타고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차는 병원을 향하는 유일한 길인 사고지점을 경유하다가 급정거한다. 길에 고라니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순간 아마 영화를 보는 관객은 물론이고, 한번도 생각을 합쳐본 적이 없는 희주와 영남까지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고가 난 밤에도 갑자기 고라니가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누가 진짜 가해자인지, 새로운 정황과 증언을 쉴 틈 없이 제시하다가 돌연 완전히 새로운 갈래의 가설을 던지며 마친다. 영화는 사고 당사자였던 영남의 남편을 통해 그날의 일을 증언하게 하지 않고,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을 영원히 유예시킨다. 속 시원한 결말이 아닐 수 있지만, 우리는 오랜 시간 고통받고 있던 두 사람의 가장 해방된 순간을 목격한 것일지도 모른다. 은영이를 아직 찾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가해자의 편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가설이 유효한 순간 말이다.

 

아무 증거도 증인도 없는 교통사고로 인해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의식불명에 빠져있다. 오직 추론을 통한 과학적 수사로 희주의 남편은 가해자가 되었고, 영남의 남편은 피해자가 되었다. 희주와 영남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한 덩어리다. 그들은 모두 죽었거나 의식불명인 남편을 두고 온전히 슬퍼할 수 없는 채 고통만 받고 있다. 희주는 남편이 죽었는데도 (희주 오빠의 표현에 따라) 그래도 숨은 붙어 있는 피해자에게 피해보상금을 전한 채 죄책감에 빠져있었고, 영남은 딸과 자신의 생계까지 책임지면서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남편이 깨어나길 기다린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웃음이 번지는 일이 없으며, 종종 분노나 고통이 떠오를 뿐이다. 두 사람과 달리 언제든 새로운 정황이나 증거, 증언에 의해 전복될 수 있는 상태에 지배받지 않는 이는 은영이다. 은영에게는 슬픔이 있다. 은영은 수사 결과에 따라 희주의 남편이 가해자로 결론이 난 상태에서도, 아빠가 가해자일지도 모르는 정황을 알고 있어도, 고라니의 출현이라는 최후의 가설을 알지 못한 채 희주 남편의 죽음과 죽은 것과 다름없는 아빠의 상태를 슬퍼했다. 만약 너무 아프면 일어나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면서 아빠에게 바늘을 찔러보고,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희주의 남편을 위해 이상하게 생긴 나무 밑에 꽃을 두었을 것이다. 또 은영은 영남에게 희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희주에게는 벌을 자기가 다 받겠다고도 한다. 은영은 희주와 영남을 이어주면서 마치 그들을 대신해 울어주는 사람처럼 보인다.

 

세 사람의 상태를 결말에 조금 거칠게 덧대어보자면 이 영화는 슬픔을 잃어버리고 고통을 잠시 잊어버리는 영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이야기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에서 결이 없다. 이라는 불확정한 상태에 남겨진다. 영화의 결말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은 대부분 무용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에는 확정된 진실이 없으므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한다. 아마 영남의 남편을 통해 새로운 증언과 정황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희주와 영남이 막연히 기대했던 것처럼 그것이 죽은 사람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2시간 동안 맞춰온 퍼즐에 마지막 한 조각의 빈자리를 남겨놓는 일이 될 것이다. 희주와 영남은 진실을 들었다 해도 한 조각의 빈자리 때문에 확정을 지을 수 없고, 영화는 여전히 진실을 결말지을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아마 여전히 지금과 같은 고통을 지고 살지도 모른다. 슬픔을 잃어버리고 고통을 잠시 잊어버리는 영화라는 말을 좀 더 인과관계가 얽힌 말로 바꿔볼까 한다. 이 영화는 슬픔을 찾으려고 하자 고통이 멈추는 순간을 맞이한다. 중요한 것은 슬픔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희주가 철저하게 무시했던 우리 모두 피해자태도처럼 이들이 맞닥뜨린 상황을 대충 넘어가자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희주와 영남 사이에서 밝혀지는 일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마땅히 슬퍼하지 못했던 것들의 나열이다희주와 영남에게는 그들이 겪은 일에 마땅한 애도와 슬픔이 부재하다. 한 사람이 사고로 죽고 한 사람이 의식을 찾지 못하고 병상에 있는 것에, 더 오래는 한때 서로를 사랑했을 부부에게 괴로움만 남은 것과 일터에서 산업재해로 불구가 된 고통에는 슬픔이 필요하지만 희주와 영남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영화에서 알 수 있는 최초의 일들에 이들이 슬퍼할 수 있었다면, 이후의 고통과 괴로움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슬픔을 되찾아야 한다.

 

-송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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