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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세> 리뷰 : 그늘을 벗어나 햇살 안으로 나아가는 용기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0. 9. 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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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세>

그늘을 벗어나 햇살 안으로 나아가는 용기

 

영화의 첫 장면은 시각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 위로 효정(예수정)과 중호(김준경)의 목소리만 들린다. 관객은 효정과 중호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서만 효정과 중호의 성별, 관계, 대화 장소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다리가 예쁘다는 중호의 말을 효정이 불편하게 느끼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검은 화면은 사라지고 치료실이 보인다. 가림막이 처진 한곳에서 빛나는 붉은 전등 빛이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다.

 

이후 영화는 효정이 중호에게 당한 치욕을 해소하는 과정을 담는다. 효정은 늙은이의 설움과 그에 함께 여성의 억울함에 짓눌린다. 그 누구도 60대 여성이 2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고백을 제대로 믿어주지 않는다. 젊은 남자가 무엇이 아쉬워 늙은 여자를 범하겠느냐는 태도가 기본전제로 깔려있다. 때문에 나이 들어도 몸매가 처녀 같다’, ‘어르신이 옷을 참 차려입는다는 효정을 향한 칭찬이 어딘가 모르게 불쾌하다. 좋은 뜻임에도 효정에게 노인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제대로 된 행실을 보이지 못했다는 질책이 은근하게 묻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정은 진실을 밝히려 한다. 그날의 사건을 증언하고 증거 물품을 제시하는 효정의 용기를 보면서 어느새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합의한 성관계라는 중호의 진술이 뻔뻔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만큼 효정의 호소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에 효정의 진술에 착각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중호의 진술처럼 효정은 사건 이전에 중호와 마주친 적이 있다. 심지어 몇 마디 대화도 섞었던 사이이다. 하지만 중호의 진술에도 거짓이 있다. 중호가 효정에게 소개해주었다던 병원은 효정의 전 직장 동료가 소개해 준 것이다.

 

두 사람의 두 가지 엇갈린 기억에 대해 영화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효정의 혼재한 기억을 마주하자 효정의 편에 서서 있던 관객으로서 내적 갈등을 느낀다. 앞으로 효정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당혹감이 솟구친다. 하지만 금세 효정을 향해 마음이 기울어진다. 수영장 안에서 어린아이가 실수로 효정의 종아리를 만진다. 타인의 손이 살짝 스친 것만으로 효정은 몸을 덜덜 떨릴 정도로 두려워한다. 머리의 기억에는 실수가 있을지언정 몸이 기억하는 공포와 수치의 경험에는 거짓이 없으리라 믿게 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효정은 어두운 계단을 오른다. 계단의 끝에서 문을 열자 햇빛이 들어온다. 효정은 그늘을 벗어나 햇살을 맞이고자 한다. 계단을 오르는 그녀에게서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느낀다. 옥상에 선 효정의 옆에는 종이뭉치가 두껍게 쌓여있다. 그것은 효정이 자신의 손으로 작성한 고발장이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를 대변한 수백 장의 고발장은 하늘에 흩뿌려져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봄볕에 눈물도 찬란하게 빛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햇살 안에 들어선 효정이 맞이할 무수한 싸움에서 아름답게 빛나기를 기원한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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