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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 앞, 1초 뒤> 리뷰 : 기다리는 자에게 기적이 있다면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6. 2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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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 앞, 1초 뒤>

기다리는 자에게 기적이 있다면

 

 남들보다 빠른 하지메는 알람을 맞춘 7시가 되기 몇 초 전 눈을 뜨고 알람이 울리는 순간 시계를 끈다. 일터인 우체국에서는 손님이 대기 번호표를 받기가 무섭게 전광판에 그 숫자를 띄우고 손님을 호명한다. 하지메가 붙잡는 순간은 남들이 알아차리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보다 항상 빠르다. 하지메는 이른 삶을 산다. 그만큼 앞서가고 앞선 만큼 시간을 모은다. 1초가 모여 1분이 되고 1분이 모여 1시간이 되고 1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남들처럼 하루를 살지만 사실 남들보다 긴 하루를 사는 셈이다. 하지메가 다가오는 시간을 붙잡는 비상한 운명을 지녔다면 레이카는 시간이 멈춘 가운데 움직이는 비상한 운명을 지녔다. 내릴 정류장을 놓쳐 뒤늦게 벨을 누르기 일쑤고, 손으로 모기를 잡아본 적 없는 레이카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카메라로 순간을 붙든다. 그리고 붙든 순간에 축적되는 시간만큼 많은 것을 기억한다. ‘스메라기 하지메(皇一)’, 뭐든 빠른 하지메는 쓰기 쉬운 제 이름도 순식간에 쓴다면 초소카베 레이카(長宗我部麗華)’, 한 획 한 획 천천히 쓰는 레이카는 다른 친구들이 시험지에 이름을 쓰고 문제를 몇 개나 풀고 나서야 복잡한 제 이름을 다 쓴다. 남들보다 느린 레이카는 빠르게 지나간 시간 뒤에 머뭇거리고, 머뭇거리며 뒤늦은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메가 늘 1초 앞에 있다면 레이카는 늘 1초 뒤에 있다.

 

 세상의 속도는 앞서 나가는사람을 기준 삼는다. ‘뒤처지는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뒤처지는 사람은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따라갈 수 없고, 멈출 수도 없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죽음 앞에서 살 시간이 주어지듯 시간이 멈춘 하루. 이 하루는 뒤처지는 사람이 앞서 나가는 사람을 따라잡는 시간이 아니라, 느려도 늦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일깨우는 시간이다. 신은 누구에게나 시간을 준다. 삶은 시간이다. 삶이 시작하는 순간 모습을 감춘 신은 빨라서 앞서 나가는 사람에게 유리한 세상, 다시 말해 느려서 뒤처지는 사람에게 불리한 세상에 특별한 시간을 부여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이 특별한 시간은 시곗바늘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돌아가는 것과 다른 시간이다. 빨라서 앞서 나가는 사람에게 주어진 만큼 느려서 뒤처지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시간. 신은 느려서 뒤처지는 사람에게 주어진 적 없는 시간을 그러모아 하루를 마련한다. 오랫동안 뭉근하게 끓인 수프처럼, 느리게 천천히 살아온 만큼 깊고 진한 기억을 돌보는 하루는 죽지 않고 내일을 맞는 힘이 된다. 시곗바늘을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돌리지 않아도, 이들의 시간은 뒤를 보고 앞을 본다. 멈춘 시간의 가장자리에 서서 등 뒤의 어제와 눈앞의 내일을 맞는 오늘을 산다. 앞서나가지도 뒤처지지도 않는 지금을 산다. 기적 같은 하루가 운명처럼 다가온다. “의 선물이다.

 

 생강을 사 오겠다며, 덩달아 아이스크림도 사 오겠다고 약속한 하지메의 아버지는 사실 죽으러 나갔다가 시간이 멈춰 죽지 못했다.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다니. 이름 획수가 총 73획이나 되는 하지메의 아버지는 10년 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알았다. 이런 운명을 알았다. 그리고 10년 후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하루가 저문 밤 운명적으로 만난 아마도 만나지 않을 수 없었을 레이카에게 불현듯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알려준다. 남들보다 늦는 사람에게 주어진 하루. 불현듯 주어진 시간의 의미는 불현듯 주어지는 기적의 의미를 되짚는다. 하지메가 하루를 잃어버린만큼 레이카가 하루를 얻기 전 며칠 동안 레이카는 운명에 이끌리듯 하지메를 발견한다. 하지메의 뒤에서 하지메의 오늘을 살피고 내일을 걱정한다. 그리고 하지메의 시간이 멈춘 한편 자신의 시간은 멈추지 않은 하루를 얻는다. 움직이는 것을 찍지 못하는 레이카는 움직이지 않는 하지메를 찍는다. 어린 시절 병원에서 만난 둘이 언젠가 꼭 같이 가기로 약속한 바닷가에서 붉게 그을리는 시간이 사진에 붙들린다. 멈춘 시간이 사진에 남는가 하면, 멈추지 않은 시간이 사진에 남는다. 잃어버린 시간이 사진에 남는가 하면, 잃어버린 적 없는 시간이 사진에 남는다. 하지메의 아버지가 죽을 결심을 한 순간, 레이카가 하지메를 지키고 싶었던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의 복선은 기적의 순간을 기적의 시간으로 늘린다.

 

 빠르고 이른 삶은 시간을 숫자로 명시한다면, 느리고 늦는 삶은 시간을 이야기로 암시한다. 하지메의 아버지가 사주지 못한 아이스크림을 사서 하지메를 만나는 레이카는 기적의 하루 그다음 날부터 363일을 기다린다. ‘같은시간을 하지메도 기다린다. 2초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어 마침내 둘이 만나기까지 363일이 걸렸다면, 2초가 363일이 되는 이야기는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자에게 기적이 있다면. 우표를 사러 온 레이카에게 아이스크림을 받아 든 하지메의 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사는 게 너무 버거운 이들에게, 삶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혹은 너무 느려서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설령 내 시간이 멈춘 채 하루를 넘는다 해도 말이다.

 

- 관객리뷰단 한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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