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다섯 번째 방> 리뷰 : 첫 번째 방은 첫 번째 방이 아니다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6. 11. 16:24

본문

 

<다섯 번째 방> 

첫 번째 방은 첫 번째 방이 아니다

 

 지난날 집 속의 집(전찬영, <집 속의 집 속의 집>)을 발굴한 감독은 이제 방 밖의 방을 탐색한다. 집 속에 집이 있고 다시 집 속에 집이 있는 집의 소실점은 한집에 사는 가족이면서 서로 다른 집을 꿈꾸는 딸(감독)과 아빠 사이에 머문다. 이러한 한편 방 밖에 방이 있고 다시 방 밖에 방이 있는 시야는 한집에 사는 가족이면서 서로 다른 집을 꿈꾸는 엄마와 아빠를 담는다. 딸과 아빠 사이에서 흔들리는 소실점은 딸과 아빠를 오가는 시선이 되어 집 속의 집 속의 집에 모였다가 집 밖의 집 밖의 집으로 퍼지기를 반복한다면, 엄마와 아빠를 오가는 딸의 시선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거듭 옮겨가는 엄마와 엄마를 따라다니는 아빠를 쫓는다. 집 속의 집을 향한 시선은 마주 보는 거울이 거울 속 거울을 보여주듯 굴절된 관계를 포착하고, 방 밖의 방을 향한 시선은 옆 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감내하듯 불균형한 관계를 포착한다. 굴절된 관계와 불균형한 관계. 집 속의 집과 방 밖의 방은 벽을 공유하는 이편과 저편이다.

 

 방은 네 벽과 하나의 천장과 하나의 바닥으로 이루어진다. 육면체다. 한쪽 벽에 난 문은 벽을 부수지 않고 방을 드나들 수 있는 공식적인 통로다. 문에는 잠금장치가 있지만 비밀번호를 아는 누구나 출입할 수 있다. 비밀번호를 알아도 방 주인의 허락 없이 출입할 수 없다는 상식은 집주인에게 부재한다. 방 밖의 방은 집 속의 집이다. 방 주인인 엄마는 집주인인 아빠가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지 못한다. 방과 방 사이 벽을 뚫고 들려오는 소음은 방 주인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방의 조건을 은유하고 방문을 열어달라며 문을 때리고 손잡이를 뒤흔드는 소리의 복선이 된다. 엄마의 방은 없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자이언티, <꺼내 먹어요>)라는 어느 노랫말처럼 방에 있어도 방에 가고 싶은 엄마는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방을 찾는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반경. 그것은 양쪽으로 뻗은 두 팔의 길이를 지름 삼는 원으로 충분치 않다. 기본권이 보장되는 반경의 물리적인 크기는 내가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보낼 수 있는 공간. 타인과의 거리다. 적당한 거리는 저마다 다르지만, 내 공간을 보장하는 거리의 적당함은 대단치 않다. 약간의 거리, 약간의 차단. 벽 네 개와 문 하나는 약간의 거리와 약간의 차단을 보장하는 최소 조건이다. 방과 방의 간격에서 재조명되는 최소 조건은 이 방의 나와 저 방의 네가 주고받는 언어를 재구성한다. 내 방이 내 방이 아닐 때 더는 견딜 수 없는 나의 외침은 방들이 모인 집의 존재를 되묻는다. 결혼하고 시댁을 벗어난 적이 없는 엄마는 한집에서 여러 방을 전전하며 내 방을 찾았다. 상담사로 일하며 경제력이 생기고 일거리가 없는 아빠 대신 실질적 가장이 된 엄마에게 주어진 방들은 결국 시어머니에게 집을 물려받을 남편, 집주인인 아빠에게 존중받지 못한다. 두려움, 슬픔, 괴로움. 집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온갖 감정을 담는다. 집 속의 집이 방이라면, 넓지 않은 집안에서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는 엄마는 두려움, 슬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집 속의 집에 머무는 한 아빠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더는 견딜 수 없는 엄마는 집 밖의 집을 찾는다. 엄마와 함께 집 밖의 집을 찾는 딸은 엄마와 함께 집 속의 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른 방, 다른 집을 찾아 나선 엄마는 아빠에게서 멀어진다. 엄마와 아빠의 거리가 늘어난다. 늘어난 거리만큼 두려움, 슬픔, 괴로움이 줄어들 수 있을까. 아빠가 없는 엄마의 집은 또 다른 방, 또 다른 집을 약속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에게 악당이 필요했던 걸까.” 감독은 자문한다. 아빠는 정말 악당일까. 아빠의 짐승 같은 눈”, 아빠가 집어던지는 물건들. 그래서 두려웠고 슬펐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시간은 감독이 나고 자란 집의 시간, 엄마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거듭 옮겨 다니며 자기만의 방을 찾던 시간이다. 시간은 흘러가는 한편 흘러온다. 시간이 흐른 흔적은 고스란히 남는다. 그래서 감독이 바라보고 카메라에 담는 아빠는 악당이었고 악당일 수밖에 없을 터다. 그러나, 분명 두려웠고 슬폈는데, 두려움도 슬픔도 괴로운 까닭은 나에게 악당이 필요한가라는 물음 때문일 터다. “엄마도 좋지만 아빠도 좋지?”라고 묻는 아빠를 흘려보낼 수 없어서, 아빠는 나쁘지만 나쁜 아빠를 미워할 수 없어서 카메라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 머문다. 집 속의 집들은 끝없이 굴절하고 방 밖의 방들은 끝없이 괴롭다. 굴절하는 괴로움과 괴로운 굴절 사이에서 적당한 반경과 적당한 거리를 생각했다. 누구의 방도 아닌 내 방. 첫 번째 방이라고 부르고 싶은 그 방을 생각했다.

 

- 관객 리뷰단 한승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