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 디셈버> 리뷰 : 거울을 사이에 둔 진실과 허구, 그 메울 수 없는 간극에 대하여

 

 

<메이 디셈버>

거울을 사이에 둔 진실과 허구, 그 메울 수 없는 간극에 대하여

 

 엘리자베스는 촬영을 앞둔 영화의 배역 연구를 위해 서배나에 잠시 머물고 있다. 이곳에는 그녀가 연기하게 될 그레이시(줄리안 무어)가 살고 있다. 그레이시는 20여 년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1992년, 30대 중반이었던 그녀는 당시 13살인 아들 조지(코리 마이클 스미스)의 학교 친구 조(찰스 멘튼)와 성관계를 맺은 것이 적발되어 미국 전역의 신문 일면을 장식했다. 더욱이 그레이시는 아동학대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고 법정에 선 순간까지 반성 대신 자신과 조는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호소하여 비난과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현재, 그레이시는 조와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두 사람은 세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수감 중에 출산한) 딸 아너(파이퍼 쿠르다)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고, 쌍둥이 남매 찰리(가브리엘 정)와 메리(엘리자베스 유)는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있다. 영화의 초반, 그레이시의 집을 방문한 엘리자베스의 시선에서 비친 조의 품에 안겨 그와 대화를 나누는 그레이시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휴일의 여유를 즐기는 그레이시는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 보인다.

 세간의 멸시와 편견 속에서 꿋꿋이 지켜낸 그레이시와 조의 사랑이 욕정이 아니라 진실된 마음이었다는 확신이 들어서기 직전, 영화는 장면을 바꾸어 한밤중 침대에 누워 흐느끼는 그레이시를 비춘다. 조가 다가와 달래어 보지만, 그녀는 쉽사리 눈물을 그치지 않는다. 그레이시의 가정에서 안정적인 행복을 느낀 것도 잠시, 이들 주변으로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레이시 가정의 균열은 다름 아닌 엘리자베스로부터 시작된다. 감독 토드 헤인즈는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훌륭한 재능 중 하나를 탐구하는 영화"라고 <메이 디셈버>를 소개했다. 그가 말한 재능이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거대한 거부감'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엘리자베스를 매개로 그레이시의 인생을 탐구하면서 그레이시가 외면하고 있던 과거를 마주하게 한다. 결국, 그레이시가 오랜 세월 묻어둔 진실의 내막(특히, 조와의 사랑에 관한)이 벗겨지고 그녀가 '역경을 이겨내고 지켜온 사랑의 결실' 곳곳에 곪아있던 상처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는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가 함께 등장하는 다수의 장면에서 거울을 통해 두 사람의 모습을 화면에 비춘다. 거울에 맺힌 상은 사물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나,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화면을 통해 보이는 거울에 비친 상과 실물은 매우 흡사하기에 이 둘을 분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졸업식 드레스를 쇼핑하는 메리를 기다리며 옷가게 안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눌 때, 그레이시의 화장법을 배울 때, 가족 외식 중 화장실에 서서 짧은 대화를 나눌 때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는 나란히 거울 앞에 서 있다. 거울 앞에 노출되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와 닮아간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레이시를 연기하려는 엘리자베스의 모사(말투, 동장, 옷차림, 화장법 등)가 쌓여가면서 두 사람의 외면은 점점 비슷해져 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배우의 업이라지만, 그레이시의 삶에 과도한 호기심과 의문을 가지고 그것을 알아차리려는 엘리자베스가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와중에 생각의 한편에서는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가 본래부터 유사한 부류의 인간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자리를 키워나간다.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는 상황과 주변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성향이 강한 듯 보인다. 그레이시는 자녀를 위하는 마음을 무기 삼아 자녀들이 먹는 음식, 의상, 체중을 규제하고 관리한다. 그리고 그레이시는 남편 조에게 언제나 아내의 요구에 따라야 하며, 아내가 힘들어할 때 위로를 해내야 하는 책무를 부여한다. 책임의 무게에 눌려 있는 조가 그나마 하는 일탈이라곤 아내 몰래 인터넷 친구와 메신저를 하는 정도이다. 엘리자베스의 등장은 조의 삶에 (그레이시와의 만남 이후) 또 한 번의 파장을 일으킨다. 나비의 알을 채집해 성충으로 키워내는 조의 취미를 인정해 주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젊음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기우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관심에 자신을 조종하기 위한 계략이 섞여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 좌절과 열패감을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성교를 마치고 침대에 나란히 누운 조와 엘리자베스의 서로 다른 표정과 대화에서 낙담한 조와 무정한 엘리자베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찰리와 메리의 졸업식, 전날 밤의 갈등(엘리자베스와의 관계 후 그레이시와 조가 나눈 '과거'에 대한 견해차이)이 무색하게 조와 그레이시는 부모의 책임을 다한다. 조는 자녀들의 아침을 차려준 뒤 차로 자녀들을 학교로 데려다준다. 이른 아침 사냥을 나섰던 그레이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한 흰색 원피스를 차려입고 관람석에 앉아 졸업장을 받아 든 자녀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어찌 되었던 웃음이 가득한 졸업식에 참석한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선 그레이시 앞으로 그녀와 정말 유사하게 단장한 엘리자베스가 다가온다. 이제 이곳을 떠나겠다는 엘리자베스와 그러라 답하는 그레이시의 기세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비등하다. 그러다 자신은 '자아가 강한 사람'이라는 그레이시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다. 뒤돌아 선 그레이시를 바라보며 불안한 듯 온몸을 더듬는 엘리자베스의 행동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본체의 위엄에 주눅이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지막, 촬영장에서 그레이시를 연기하던 엘리자베스가 말하던 '진짜'에 다가가고 있다는 의미는 여전히 미궁 속을 헤매고 있다. 정말이지 '진짜'란 무엇일까.

 

- 관객리뷰단 박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