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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아미코> 리뷰 : 응답하라, 여기는 아미코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3. 1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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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아미코>

응답하라, 여기는 아미코

 

 왠지 모르게 귀를 자극하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보는 동시에 듣는다는 걸 새삼 일깨우는 영화. <여기는 아미코>의 첫 장면에 앞선 피아노 타격음은 하굣길의 아미코가 만들어내는 온갖 소리로 이어진다. 슬리퍼를 신은 발은 걸을 때마다 찰싹찰싹 소리를 내고 아미코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는 난간을 찰싹찰싹 때린다. 집으로 돌아온 아미코가 옥수수를 꽉 베어 무는 소리, 옥수수에서 즙이 나오도록 손으로 꽉 쥐는 소리는 팽팽한 공기를 가르는 화살처럼 긴장감을 유발한다.

 

 목소리도 크고 몸짓도 큰 아미코는 어떻게 저런 힘이 숨어 있나 싶게 작고 마른 소녀다. 이 작고 마른 소녀는 한결같이소란스럽고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주변을 어지럽히고 망가뜨린다. 그러나 노리를 좋아하는 마음도 태어나자마자 죽은 동생을 애도하지 못한 마음도 한결같은 아미코에게 어지럽혀지고 망가뜨려진 세상은 줄곧 낯설다. 무전기 이편의 아미코가 저편의 세상에 요청하는 응답은 아미코가 소리로 몸짓으로 표현하는 마음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나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것도 산만하게 움직이는 것도 삼가야 하는 세상에서 아미코의 표현은 눈과 귀에 거슬려서 피하고 싶은 실례失禮가 될 뿐. 얼어붙은 반응은 어떤 응답도 되지 못한다.

 

 아미코가 범하는실례가 과연 실례일까. 아미코의 바깥세상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실례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리고 아미코의 세상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것과 실례가 되는 것을 생각한다. 엄마의 턱에 있는 커다란 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나 오빠의 머리에 있는 하얀 땜통을 보여달라며 달려드는 것 모두 실례라면 실례다. 그러나 실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아미코에게 엄마의 점과 오빠의 땜통은 호기심의 초점인 한편 엄마를 엄마로 오빠를 오빠로 자리매김하는 출발점이다. 엄마의 점이 엄마를 괴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오빠의 땜통이 오빠를 괴물로 만드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아미코가 가족을 가족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의식이 실례일 수 있을까. 아미코의 세상에서는 실례도 무례도 예의도 부재한다. 아미코의 세상은 아미코를 둘러싼 세상에서 점처럼 땜통처럼 동그랗게 구멍 난 게 아닐까. 아미코의 바깥세상은 이 구멍을 메우려 하기보다 감춘다. 구멍 위에 판자를 덮은 듯 아미코의 세상은 가렸다가 들춰지기를 거듭하며 자란다. 어느덧 중학생이 된 아미코는 집에서도 교복을 벗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맨발로 학교를 누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교복을 벗고, 밖에서는 반드시 신발을 신어야 하는 관례가 중요하다면 왜 중요한가. 아미코의 세상은 한결같은데, 아미코를 둘러싼 세상이 넓어지는 만큼 작아진다. 작아지는 듯 한결같은 아미코를 보면 볼수록 아미코의 소란스러움이, 아미코의 바깥세상이 범할 수 없는 아미코의 무구한 세상이 자연스러워진다. 아미코의 소리도 몸짓도 낯설지 않다. 그렇게 아미코에게 다가갈 무렵, 아미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앞서 쫑긋 세워진 귀가 다시금 긴장하기 시작한다. 아미코를 따라다니는 소리는 정말 유령 또는 귀신이 내는 소리일까. 무서움을 떨쳐내려는 아미코의 노랫소리는 크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음량은 큰데 작게 들린다. 아미코가 아무리 크게 불러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노래는 저편에 닿지 못한다. 아미코의 소란스러움이 생존을 위한 숨 가쁜 호소로 들리는 순간, 이 소리는 너무 작다.

 

 아미코는 장난친 게 아니라 선물하는 것이었고, 지겨우리만치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니라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것이었다. 아미코가 저편과 응답을 주고받으려면 어떤 신호가 필요할까. 말을 주고받지만 말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고, 내키는 대로 진심을 전해 보지만 받아들여지기는커녕 거부감을 키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미코는 엄마를 아프게 한 셈이고 노리를 괴롭힌 셈이지만, 엄마의 고통과 노리의 분노는 저편에서만 유효한 기호다. 잘 웃는 한편 울지 않는 아미코의 고통과 분노는 어디에 있을까. 아미코의 기호는 저편의 기호 체계에 부재하거나 거기서 부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아미코"라는 신호는 난 살아 있다고 괜찮다, 아미코가 먼저 손을 내미는 소통의 이편이다. 소통의 저편에서 이 신호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미코는 소란스럽게, 큰 소리와 큰 몸짓으로 분주할 것이다. 그런 아미코가 "여기는 아미코"라고 신호를 보낸다면 응답할 수 있도록 다시 귀를 쫑긋 세운다. 그리고 연습 삼아 응답해 본다. "여기는 한승은"이라고, 그리고 난 너와 같은 여기에 있어라고. 온몸으로 절실하게 말이다.

 

- 관객리뷰단 한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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