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날의 거짓말>
온몸을 내던져 사랑한 끝에
습기를 머금은 여름날에 일어난 한 소녀의 치열한 연애담을 보며 (기대하지 못한) 경악과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불나방’ 같은 사랑이라는 표현을 이 영화를 두고 쓰게 될 줄은 정말이지 상상하지도 못했다. 청소년의 풋풋한 성장을 이야기할 줄 알았던 영화는 관객의 예상을 보란 듯이 뒤집어엎고는 끈적이고 질척거리는 관계의 이면과 그것이 남기고 간 텁텁한 감정의 뒷맛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도대체 다영(박서윤)이 병훈(최민재)과 함께 나눈 감정과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만 한가득 쌓여간다.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의 질서에 익숙해진 탓일까. 필자의 눈에는 사랑에 사로잡혀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 것 같은 소녀가 벌인 행동을 도저히 앞뒤 재지 않고 사랑할 줄 아는 자의 용기로 느낄 수가 없다. (필자의 감상은 어쩌면 스크린 너머에서 일어나는 그 여름날의 이야기가 스크린 바깥에서 살아가는 필자의 현실과 맞닿아 있기에 영화를 영화로만 바라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감각과 상황들의 연속이었음에도, 영화는 보는 맛은 무척이나 정갈했고 즐거웠다. 2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만 보아도 영화가 장면의 짜임새와 이야기의 흐름을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는 걸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개학날과 여름 방학 동안의 장면들이 교차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사건의 전말과 인물들의 변화는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필자가 본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다영의 감정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방학이 시작된 날, 해변의 작은 카페에서 이별을 고하는 민재의 음성을 뒤로한 채 다영은 컵에 손을 뻗는다. 바닥에 얼마 남아있지 않은 컵 안의 음료를 애써 빨아 마시려는 다영의 눈길이 자연스레 아래로 향한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듣고 당혹감에 휩싸인 얼굴을 감추려는 다영이 행동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민재가 떠난 카페에서 음료 컵에 휴지를 욱여넣는 다영의 앙다문 입술, 보행신호가 정지신호로 넘어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다영의 뒷모습, 과외 선생 지석(유의태)의 집에서 과일을 깎아주는 지석의 임신한 아내 은혜(윤재인)의 볼록 튀어나온 배를 바라보는 다영의 시선 등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다영의 심리를 효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억제하지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다영과 다영의 주변에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다영은 순간의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유혹을 자행하였고, 이 때문에 다영과 병훈은 감당할 수 없는 사고와 또 다른 이별을 겪어야 했다. 다영에게 현혹된 지석으로 인해 지석과 은혜의 단란한 가정은 파탄이 나버린다. 다영의 대사처럼 ‘망가져 버린’ 이들은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걸까. 온몸을 내던진 사랑 끝에 고통만을 남겨둔 그 여름날이 야속할 따름이다. 영화는 고통받은 다영에게 위로와 해결책을 제공하는 대신, ‘방학 숙제’와 ‘반성문’을 통해 다영 스스로 그 여름날을 정리하는 시간을 부여한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다영이 전하고 싶었던 말을 다영의 글과 입으로 직접 표출할 수 있게 하려는 작은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비록 다영의 고백에 담긴 진실이 학생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며 세간의 질타를 받을지라도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마주 앉아 반성문을 써 내려가는 다영과 병훈. 두 사람을 보며 어리숙하고 미성숙한 존재가 자기 행동을 돌아보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려는 결의와 함께 이 순간을 지켜주고 싶은 어떤 어른의 따스함이 느껴진 이유는 어쩌면 필자 자신이 그런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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