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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사랑>│임선애 감독 초청

CINE TALK 씨네 토크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3. 1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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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사랑> 씨네토크

2024.2.15.

 

초청 : 임선애 감독

진행 : 임오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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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정 : 안녕하세요. 오늘 진행을 맡은 영화감독 임오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님 모시고 이야기 나눠볼 텐데요. 감독님, 강릉에 방문해 주신 소감과 관객분들께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임선애 : , <69> 개봉할 때 여기 왔었거든요. 그때는 되게 청명한 날씨였는데. 오늘 강릉에 도착했어요. 비가 오다가 눈으로 바뀌면서 걱정을 했는데, 또 눈이 쌓이니까 너무 예쁘더라고요. 눈이 많이 와서 관객분들이 예매 취소하시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와주셔서 너무 반갑고요. 강릉 너무 좋습니다. 반갑습니다.

 

임오정 : 저도 서울에서 오늘 차를 타고 눈발을 뚫고 왔는데 오는 길이 완전히 수묵담채화 같더라고요. 흑백의 세계로 이루어진 모습을 보면서 <세기말의 사랑> 초반 부분도 흑백인데 이런 생각하면서 저 혼자 연결고리를 지어봤습니다. GV에 항상 나오는 질문이지만 항상 궁금한 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구상하시고 출발하시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세기말의 사랑>을 시작하게 된 시점으로 잠깐 돌아가셔서 이야기 들려주세요.


임선애 : 원래 이게 2012년쯤 제가 시나리오 전공할 때 졸업 작품으로 썼던 시나리오였어요. 그때 막연하게 이 영화로 데뷔를 하고 싶다고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썼었는데 잘 안 풀렸어요. 그래서 <69>라는 영화로 먼저 데뷔하게 됐고, 그 영화 끝나고 <세기말의 사랑>을 찍게 됐어요. 그때 당시에 여러 가지 아이템들을 교수님한테 보여드렸을 때 다 까였죠. 이 이야기는 제가 갑자기 이야기를 구상해서 썼다기보다는 제 막내 이모가 영화 속 유진처럼 근육병을 갖고 계세요. 어렸을 때부터 이모랑 가까이 지내면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 선입견으로부터 각성이 일어났던 것 같아요. 이모 같은 경우도 선천적인 게 아니라 20대 초반부터 몸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거든요. 실제로 아름다운 외모도 갖고 계시고, 노는 것도 좋아하고, 취향도 되게 남다르셨는데 이모가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성격도 그렇고. 장애라는 게 어떤 사람을 수식하는 전부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면서 문득 이런 로그라인이 생각났어요. 비장애인 여성이 장애인 여성을 질투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보통은 반대로 생각하기 마련이잖아요. 로그라인이 정해지고 이야기가 확장되면서 지금의 이야기가 된 것 같아요.

 

임오정 : 그 로그라인 너무 재밌지 않나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왜 그걸 여태까지 생각 못했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이야기인데요. 2012년에 쓴 작품을 다시 꺼내서 이야기로 출발시키려면 많은 수정 작업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각색에 중심을 두신 부분이 어떤 점인지 궁금합니다.

 

임선애 : 아무래도 이모를 모델로 삼았고, 그게 이야기의 씨앗이 되다 보니까 그 부분이 밀도가 더 높다고 해야 되나 그랬었던 것 같아요. 근데 결국에는 제가 이걸 쓸 때는 당사자성이 아니기 때문에 좀 피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관객 눈높이 맞춰서 볼 수 있는 인물을 쓰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그때도 영미라는 캐릭터가 있었어요. 근데 이야기를 쓰면서 오히려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사람은 영미가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여러분이 어떻게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 안에서 영미와 유진을 굉장히 공평하게 그려내려고 했었거든요. 처음 시나리오에서 그런 변화들이 있고, 가장 큰 변화는 시대를 세기말로 바꾼 거였어요. 제가 이걸 처음 쓸 때는 2012년 현재의 이야기였어요. 근데 아무래도 10년 뒤에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봤을 때는 좀 낡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재 시점에서 장애인 돌봄, 보호사 이런 도우미 시스템이 굉장히 철저하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영화를 쓰는데 일종의 장애물들이 좀 약화되기도 하잖아요. 또 제대로 고증하지 않으면 논란이 될 수 있고. 그러면 아예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 이유가 영미가 되게 주눅 들어 있고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살았던 인물이 아니라 소심하고 폐쇄적으로 살았던 인물인데요. 그런 인물이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처럼 어떤 큰 계기가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저도 세기말의 시기를 통과했던 세대라 그때 정서들이 영화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시대적인 게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임오정 : 저도 1999년도에 고3이었던 나이라서 굉장히 그 시대의 분위기를 너무 잘 살려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영화의 제목처럼 혼란스러운 세기말에 감독님은 1999년도 1231일에 무엇을 하셨나요?

 

임선애 : 너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감독님도 되게 뚜렷한 기억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얘기해 주세요. 감독님도.

 

임오정 : 그때 사춘기를 겪고 있는 시기였어요. CD플레이어로 제가 좋아하는 플라시보의 음악을 들으면서 굉장히 비장한 마음으로  옥상에 올라가서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어떻게 망하는지 지켜보겠어. 이런 마음으로.

 

임선애 : 진짜 멋있는 것 같아요. 저는 좀 소심했거든요. 혹시 완전히 망하지 않고 반 정도 망하면 살아가야 되잖아요. 그래서 가스가 중단될지 몰라서 부탄가스도 사놓고, 참치도 사놓고. 사실은 엄마의 명령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컴퓨터에 많이 다운 받아 놨었단 말이에요. 영화들을 백업하느라 세기말의 시간을 할애했어요. 그때 또 자정 넘어갈 때 컴퓨터를 켜놓지 말라는 얘기가 있었어요. 일정 시간 동안 컴퓨터도 안 켜고 텔레비전만 주시하고 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구나 하고 그때 컴퓨터를 켰죠.

 

임오정 : 저는 감독님이 세상에 종말한 후에도 가지고 싶었던 그 영화 리스트가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임선애 : 제가 그때 영화에 입문을 했을 때인데 유럽병에 빠져서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도 있었고 주로 유럽 영화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임오정 : 저도 에릭 로메르 병에 빠졌었는데. 어떤 영화 제일 좋아하세요?

 

임선애 : <녹색광선> 좋아하고요. 사계절 연작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가을 이야기> 좋아해요.

 

임오정 : 저도요.

 

임선애 : 진짜요? 따로 얘기해요. (웃음) 또 좋아하는 게 <끌레오의 무릎>이고, 그런 영화들 좋아해요.

 

임오정 : 여러분들도 혹시 유럽병에 빠지고 싶다면 에릭 로메르 영화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랑 임선애 감독님이 만드는 영화가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의 되게 섬세한 내면과 관계성을 다루는 게 아마도 유럽병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어요.

 

임선애 : 맞아요. 제 데뷔작 <69>도 유럽병 걸려서 찍은 거예요. (웃음)

임오정 : 이 영화가 제목부터 <세기말의 사랑>이고, 동시에 이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영미는 자기의 일상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감옥에 갈 정도로 희생적인 사랑을 하는 인물이고, 유진이 사랑하는 방식도 되게 아름답고 숭고해 보였는데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기 사랑을 증명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도영 같은 경우는 굉장히 순애보에 가까울 정도로 잔잔하고 고요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그 외에 다른 조연 인물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에 엮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감독님이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사랑의 모습은 어떤 거였을지 궁금합니다.


임선애 : 제가 사랑 영화를 찍으니까 사랑에 대한 담론이나 저의 사랑관에 대해서 많이 물어보시더라고요. 근데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영미 같은 경우에 영화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마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큰집에 들어가서 살게 됐는데, 자기를 거둬준 분들이니까 일종의 부채감이나 책임감으로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도 삶을 자기 스스로 선택하면서 살지 않았던 인물 같아요. 그런 영미에게 삶에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영미에게 사랑은 단지 몽글몽글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어떤 삶의 선택과도 같은 문제인 거죠. 또 거기에 유진도 몸은 죽어 있잖아요. 물론 겉으로 막 위악도 부리죠.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자기가 호구를 부린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명분인 것 같아요. 저 사람들이 나를 연민해서 도와주는 거라기보다 내가 호구를 부리는 거야라고 말하는 게 마음이 훨씬 편하잖아요. 그러니까 유진에게도 도영과 위장 결혼이라는 명분이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걸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람의 인생만큼은 망치고 싶지 않은 거죠. 그냥 쿨하게 나랑 결혼하자 이런 게 아니라 위장결혼 하자, 나 보호자가 필요한 거야라고 포장을 하죠. 그 점 역시 유진이가 사는 삶의 영역 안에서 본인이 표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이었을 것 같아요. 도영도 영화 속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소풍 장면에서 아버지의 빚이 아들에게 넘어와서 도영이 이제 앞으로 아버지의 빚 때문에 계속 쫓겨 다니는 삶을 살 테고, 그러면 취직한다고 하더라도 통장에 돈이 쌓여가는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자기 삶을 살고는 싶으니까, 그리고 유진의 명분을 받아들인다는 하지만 실제로 유진을 좋아하기도 하니까, 그런 명분 아래 일단 빚을 청산하는 게 가장 중요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사랑이라는 게 영화 속 인물들에게 자기 삶의 선택과도 같은 문제였고,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지만 용기를 낸 거 아닐까 싶어요. 그런 선택 끝에 영미는 결국 감방까지 가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해보려고 하는 용기가 그들에게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임오정 : 캐릭터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에 따라서 캐릭터가 막 바뀌기도 하거든요. 근데 저는 영미와 유진의 이름이 어떻게 보면 약간 평범하잖아요. 그게 너무 좋았어요. 왜냐면 우리가 생각할 때 되게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두 명의 인물이지만 사실 우리의 선입견으로 얼마든지 정형화된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인물들이긴 하거든요. 장애를 가진 여성이기도 하고, 뭔가 얼굴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여성 캐릭터를 우리가 아는 뻔한 방식으로 상상할 수도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굉장한 개성을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보편적인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게 결국에 우리의 이야기로 느껴지고 내가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 수 있는 이야기로 확장시켜 나간 것 같아요. 감독님 영화를 보면 인물들을 바라보시는 방법이 굉장히 새롭더라고요. 평소에도 인물 관찰을 좀 하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관찰되었던 어떤 것들이 새로 재탄생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임선애 : 사실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겠어요. 불교에서 자성이 없다고 하잖아요. 내가 왜 여기서는 이런데 다른 데서는 이럴까? 내가 왜 이러지 못했을까? 왜 나답지 못했을까? 이런 질문 끝에 결국엔 나 다운게 뭔데?라는 질문만 남잖아요. 그러니까 영미라는 세계를 바라볼 때 영미는 이럴 것이다라고 정해놓은 모습을 좀 비틀어서 다르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들도 보통은 연민이 많잖아요. 실제로 장애인을 소재로 한 영화나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제가 아는 영화들 중에서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 본다거나 장애인을 둘러싼 주변의 가족들이 희생해야 되는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장애인을 부자로 만들고 상대역을 비장애인인데 가난한 설정으로 만들고, 마치 그 안에서의 계급 갈등과 그런 시너지에서 오는 흥미 유발하는 이야기도 많고요. 근데 그게 이젠 너무 지루하죠. 저한테는. 제 주변에 이모도 그렇고 그냥 소시민인 장애인들도 영화에 나올 수 있는데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들이 계속 복습되듯이 나오니까 창작자로서는 좀 지루한 거죠. 사실 하늘 아래에 새로운 건 없잖아요. 그러니까 비슷한 직업,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많지만 그런 건 비슷해도 보여주는 각도는 좀 다르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영미를 흑백으로만 봤을 때는 영미가 입고 있는 옷의 색감 이런 것들을 무채색 계열로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흑백에서 컬러로 화면이 바뀌면서 사실은 영미가 신고 있는 운동화가 핑크색이었다는 것. 그 자체가 주는 카타르시스 뭐 그런 걸 좀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부로 의도적으로 장치를 만들었지만 그런 것들이 계속 수거가 되면 관객들이 연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좀 다채롭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임오정 : 마지막 장면에서 영미가 망설이잖아요. 대답을 할지 말지. 맨드라미의 꽃말 얘기하면서 뭐라고 대답할지 너무 궁금한 거예요. 저러다가 대답을 안 할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대답을 해서 너무 다행이고 영미가 성장했다 이런 느낌이 들었는데 동시에 제가 작가라면 맨드라미 꽃말을 뭐라고 말하게 할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치정과 시들지 않는 사랑, 이 둘 중에 뭐로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영미의 마지막이 확 달라지잖아요. 치정이라고 답하는 것을 선택하셨는데 어떤 의도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임선애 : 고백이기도 한 거죠. 어떤 의미로. 사실 시나리오에서는 마지막에 영미가 엄청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유진의 내레이션이 튀어나와요. 시들지 않는 사랑이라고 말하라고 하는 것처럼. 유진이 도영이랑 화상 접견할 때 네가 말한 이상한 여자를 만났다, 처음으로 안심이 되더라 하면서 도영을 보내주고 싶어 하잖아요. 근데 도영은 나는 네가 안심이 안 됐다 하고 연결이 끊기는데 유진이의 마음은 그랬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도영이가 출소 후에 유진이랑 이혼을 진짜 했을까 안 했을까는 모르겠어요. 모르는 걸로 남겨두고 싶은데. 여러분 캐치하셨나요? 영미가 화상 접견을 마련해 주고 문을 닫고 나갈 때 도영의 얼굴이 잠깐 보이니까 엄청 좋아하잖아요. 근데 지금은 아니지 이러면서 둘 만의 시간을 위해서 문을 닫잖아요. 그렇지만 도영이 영미에게 갚아야 할 돈이 남았잖아요. 일수 도장을 찍으면서 몇 번 더 볼 수 있고. 저는 영미가 자신만의 사랑을 선택했다는 게 내가 이 사람을 가지지는 못해도 근처에서 몇 번씩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요. 왜냐면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더 깊은 사랑을 하고 있는 유진과 도영의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렇다고 영미가 아름답게 보내준다는 느낌은 아니에요. 나도 볼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볼 거거든. 이런 느낌처럼. 유영 씨가 GV에서 했던 말을 좀 대신해드리고 싶어요. 영미는 이제 세상에 무서울 것도 없고, 만약 예전의 영미였다면 둘이 이혼도 한다고 했으니까 내가 여기서 도영을 낚아챌까? 맨드라미의 꽃말을 시들지 않는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제대로 고백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어요. 근데 치정이라고 말해도 영미는 그 말에 속박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치정이라고 말해도 자기 사랑을 표현할 것 같고, 상관없을 것 같은 거죠. 그 말을 했다고 해서 도영을 잊겠다는 선언도 아니고 영미는 도영을 계속 볼 것 같다고 유영 씨가 말하더라고요. 영미답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뭐 나중에 영미도 다른 사람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도영이가 별로일 수도 있죠. 나중에는. 하지만 좋아할 때까지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에 오히려 그게 영미답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관객 1 : 사탕이 무슨 맛이었는지 궁금해요. 영미가 계속 사탕을 달고 사는 느낌이어서 그런 콘셉트를 잡으신 게 궁금하고 사탕은 무슨 맛이었을지도 궁금합니다.

 

임선애 : 여러분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굳이 두 인물 중에 제가 투영된 인물이 누구냐 하면 영미거든요. 영미의 삶이 얼마나 팍팍해요. 맨날 당이 떨어지는 거죠. 저도 시나리오 쓸 때는 단 거를 계속 물고 있거든요. 무슨 맛이었는지까지는 모르겠어요. 처음에 재봉틀 장면에서는 사탕을 종류별로 다 샀어요. 흑백으로 찍을 때 바닥에 깔리는 천과 대비가 많이 되는 사탕 색깔로 골랐어요. 그래서 사탕은 맛보다는 색깔로 정했고요. 그다음에 출소할 때는 소품이 준비가 안 돼서, 쿠팡에서 급하게 사탕을 주문했어요. 조스바 먹으면 혀에 색이 물드는 것처럼 그런 사탕을 구해달라고 했어요. 이게 뭐냐면 입소할 때 주머니에 들어 있던 사탕이었겠죠. 누가 그걸 넣어주지는 않았을 거니까. 출소하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옛날에 넣어둔 사탕이 있는 거죠. 6개월에서 8개월 정도 주머니에 있었으니까 그 눅눅한 사탕을 이제 꺼내서 먹는 거죠. 아무튼 맛은 초록초록한 맛이었던 것 같습니다.

 

임오정 : 갑자기 당이 당기네요. 제가 궁금한 게 참 많거든요. 영미가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염색하잖아요. 영미가 염색을 당한 건가요? 아니면 자발적인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임선애 : 되게 예리한 질문인데요. 원래 영미랑 준이 미용실에서 만나고 나서 대화씬이 더 있었어요. 준이는 미용대회 준비 중이니까 연습할 사람이 필요한 거죠. 영미랑 준이 실랑이를 하다가 오준이 한 마디 하는 거죠. 내가 우리 유진 누나보다 더 예쁘게 해 준다고 하니까 영미가 솔깃한 거죠. 그러면서 영미가 미용실 문을 본인이 열고 들어가는 씬이 있었어요. 유진이 너무 예쁘게 생겼으니까 장애인이고 뭐고 중요한 게 아닌 거예요. 그래서 영미는 약간 자괴감도 들고 좀 예쁘게 하고 유진을 찾아가야겠다 해서 머리를 한 거죠. 그게 영미다운 것 같아요.

 

관객 2 : 영화 잘 봤습니다. 이게 좀 선입견일 수도 있는데 남자 캐릭터들을 보면 인간적이긴 한데 정상적인 사람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하나같이 뭔가 더 나사가 빠져 있는 것 같고. 좋은 가족관계나 붙임성 있는 관계가 하나도 없다고 해야 하나. 좀 외로워 보이더라고요. 캐릭터들을 그렇게 설정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임선애 : 제 주변이 그런가? (웃음) 근데 다 삶의 모양이 다르잖아요. 아무리 겉으로는 화목해도 그 안에 들어가면 약간의 결핍도 있고, 모자란 부분도 있고, 상처도 있고. 그런 걸 다 안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남자 캐릭터들이 약간은 빌런처럼 나오기는 했지만 저는 완전히 악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떤 결핍에서 비롯된 생존 본능이고 하고, 또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제일 함부로 대하잖아요. 남한테는 잘하면서. 그런 게 저한테는 오히려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오준도 유진한테 무조건적으로 잘해준 게 아니잖아요. 나름 득이 있으니까. 그런 관계가 꼭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저희 가족들도 장애인 혜택을 받아서 살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꼭 필요 충분의 조건에 의해서 사는 것도 일종의 사랑의 형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나온 것 같아요.

 

임오정 : 제가 느끼기에도 남자 캐릭터뿐만 아니라 여자 캐릭터들도 다 어디 하나씩은 나사가 많이 빠져 있는 것 같았어요. (웃음) 선과 악의 모습이 적당히 섞여 있는 인물들을 되게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셨던 것 같아요. 질문 또 받아볼게요.

 

관객 3 : 감독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사랑관에 대해서 확실한 기준이 있으신 것 같아요. 궁극적인 사랑의 최종 인물을 영미라고 보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영미는 사실상 어떤 이득도 없이 오히려 본인이 손해를 보면서 사랑을 하잖아요. 혹시 그런 면을 사랑으로 보고 계신 건지 한번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임선애 : 여러분이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 흑백 장면에서는 어떤 기하학적인 공간에 영미를 극단적으로 치우치게 화면에 잡았어요. 그러니까 뭔가 출구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의 앵글들을 좀 많이 잡았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미는 자기 스스로 삶을 선택해 본 적 없는 인물이었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누군가 때문에 감옥까지 가게 되잖아요. 출소하게 됐을 때, 교도소 앞은 물론 허허벌판이지만 장애물이 다 사라진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영미는 물론 돈도 직장도 집도 다 잃고 사실상 인생이 바닥을 쳤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영미 어깨의 짐은 덜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영미의 삶에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지만 그래서 불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설렐 수 있다고도 생각했어요. 유진도 만나게 되면서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고, 결국 또 돌봄 노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거 문제가 해결이 된 거잖아요. 그리고 영미가 나도 나를 못 구하는데 주제에 그러면서 나나 구하자, 나도 나 스스로를 구해보자라는 마음을 갖잖아요. 저는 영미가 만약에 조금이라도 달라지거나 성장했다면 그 지점인 것 같아요. 영미가 유진을 만나게 되면서 서로 맞물려가는 그 지점요. 마지막에 영미가 도영을 만나는 카페 장면에서도 영미가 그러잖아요. 요즘에는 여기 와서 차도 마시고, 밖에 사람들도 구경하고, 네일 아트도 한다고. 어떻게 보면은 늘 고개 숙이고 살던 인물이 고개도 들고, 자기도 들여다보고, 자기 손도 가꾸게 된 거죠. 영미가 유진이란 사람을 겪어보고, 그 집과 세계에 가서 일종의 작은 여행을 하고 돌아와 이제는 자기의 삶을 좀 가꿔 나가면서 살 수 있는 인물로 변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요. 그게 앞으로 이 사람에게 어떤 사랑이 오든 혹은 그 사랑이 실패하든 저는 영미가 잘 헤쳐나가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임오정 : 제가 너무 궁금한 게 있어서 하나만 여쭤볼게요. (웃음) 초반에 수선집에서 일감 받을 때 남자 사장님이 휠체어를 타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유진도 휠체어를 타고 있고 사실 관람차도 원형이고 이게 다 의도하신 건가요?


임선애 : , 맞아요. 유튜버 중에 여러분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굴러라 그루님이라는 유튜버가 있어요. 그분이 되게 젊은 대학생인데 처음에는 자기 휠체어를 튜닝하는 게 콘셉트였던 것 같아요. 그걸 보면서 그분의 캐릭터가 저희 이모 같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뭔가 당당해요. 자기가 휠체어를 탔다는 것에 대해서 주눅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친구들하고 어디 놀러 가거나 여행 다니면 되게 좋대요. 친구들은 맨날 걸어 다니는데 자기는 휠체어 타고 돌아다니니까 다리가 안 아프니까. 휠체어가 그 사람에게는 일종의 옷인 거죠. 늘 타고 다니니까. 그리고 한참 멋 부릴 나이잖아요. 어떤 환경이나 분위기에 맞춰서 튜닝을 하는 거죠. 그걸 보면서 영화에 녹여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제 주변에는 이모뿐만 아니라 다른 장애인 가족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래서 저한테는 그분들을 보는 게 자연스럽단 말이에요. 생각보다 저희 주변에 많거든요. 그분들이 왜 잘 안 보이는지 아세요? 장애인들이 다니기 너무 어렵게 되어 있어서 안 나오시는 거지 분명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이 영화 속에 유진 말고도 다른 장애인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영미가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장애인이 유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영화에서 영미의 이름은 동그라미 같은 아름다움이란 뜻이고 원형의 이미지를 영화 속에 많이 상징적으로 넣어놨어요. 그래서 11일 날 먹은 떡국, 둘이 같이 숟가락 먹으면서 먹은 비빔밥, 휠체어, 둘의 추억이 담긴 관람차로. 그리고 영미가 중간에 구두 훔쳐서 팔려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놀이터에서 원형의 운동기구에서 운동을 하잖아요. 여러분 장애인을 들었다 올렸다 하는 거는 정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오십견이 온 것처럼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그것도 일종의 영미를 상징하는 것으로 가져갔던 것 같아요. 관객분들이 다 알아주시지 못해도 저희끼리는 그런 상징들을 깨알같이 영화 속에 넣어놨답니다.

 

관객 4 : 첫 장면에서 영미가 도영을 좋아하는 감정을 멀리서 표출하잖아요. 식당 장면에서 영미가 5개월 만에 입사 축하한다고 도영한테 얘기하는 거 보면 서로 얘기를 여태까지 안 한 것처럼 보이는 데, 도영이 소시지 반찬을 영미한테 나눠 주잖아요. 그게 단지 고마움의 감정을 표출한 건지 아니면 도영도 영미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그렇게 한 건지 궁금해요.

 

임선애 : 그 장면을 노재원 배우님이 연기할 때 제일 어려워하셨어요. 자칫하면 도영이 영미한테 끼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근데 설정한 상황은 영미는 도영과 말을 한 번도 제대로 섞어본 적이 없었을 거예요. 수금 때문에 총무과에 와서 건네줘도 감사합니다이렇게만 말했을 거예요. 근데 입사해서 축하한다고, 반갑다고 너무 말하고 싶었겠죠. 근데 그게 안 나왔던 거죠. 도영은 자기가 횡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미는 당연히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걸 알고서 소시지를 건네는 것과 모르고 소시지를 건네는 건 정말 천지 차이잖아요. 내가 횡령하고 있는 걸 이 여자가 막아주고 있는 걸 아는데 그러는 거면 진짜 너무 재수 없는 거잖아요. 다만 도영이가 거기 와서 소시지를 주는 건 순수한 선의죠. 영미가 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설정이 아니거든요. 도영이 배송을 마치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가 있을 거고, 그때만 식당에서 밥을 먹는 거죠. 영미가 시간표를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다 사무실에서 영수증에 풀칠하다가 식당에서 잠깐이라도 도영을 마주치고 싶어서 열두 시 땡치면 식당으로 가는 거예요. 근데 마침 도영이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영미더러 세기말 왔다 그러면서 험담도 하고, 영미는 너무 창피하니까 반찬도 김밖에 못 챙기고 빨리 자리로 간 거죠. 그걸 놓치지 않고 도영이가 사람들이 너무 했다 싶으니까 요구르트랑 반찬을 챙겨준 거죠. 도영이가 영미를 가장 수평적으로 대해주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임오정 : 소시지라서 감정이 안 담기기가 어려운데, 그렇죠? (웃음) 오늘 이렇게 관객과의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멀리서 강릉까지 오셨는데 끝까지 자리해 주신 관객분들께 인사해 주시고, 또 다음 작품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임선애 : 진짜 이탈자 없이 끝까지 자리 지켜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정말 참석하신 분들 얼굴 하나하나 다 기억할 것 같아요. 진짜 요즘에 영화가 많이 어려운데 정말 많이 와주셔서 감사하고요. 영화 잘 보셨다면 좋은 후기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눈 조심하세요. 강릉에 자주 오고 싶네요. 다음엔 어떤 영화로 오게 될까요? 사실 제가 하고 싶은 영화랑 또 저에게 어떤 영화가 주어질지는 아직은 좀 미지수인데요. 사실 <69>도 성폭력을 다룬 영화긴 하지만 노년의 사랑으로 보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리고 두 번째 영화도 제목까지 사랑이 들어간 영화인데 세 번째 영화도 사랑 영화일 수도 있어요. 이쪽으로 밀고 나가라고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멜로가 잘 된다네요. (웃음) 다음엔 어떤 모양의 사랑 영화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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