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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 리뷰 : 대를 잇는다는 허울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9. 2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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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

대를 잇는다는 허울

 

 영화 <장>은 종갓집의 3대로 이뤄진 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성별과 지위에 따라 감내하는 책임과 차별로 인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상을 모시고 웃어른을 섬기는 유교적 전통을 이어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가부장제의 빈약한 고집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시선은 세 번의 계절을 지나며 씁쓸함을 켜켜이 쌓아간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무더운 여름, 한적한 대구 변두리 어느 마을의 한 두부 공장은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질 것 같은 습기와 열기 속에서 공장의 직원들은 쉴 새 없이 두부를 만들고 포장한다. 분주한 분위기는 자연스레 공장 옆에 자리한 고택으로 이어진다. 제사 준비에 한창인 거실에서 집안의 여인들이 둘러앉아 전을 부치고 있다. 30도가 넘은 실내에서 하염없이 불 앞에 앉아 음식을 하건만 이들에게 에어컨은 사치이다. 아이를 밴 무거운 몸을 힘겹게 지탱하며 전을 뒤집는 손녀 미화(김시은)의 성화에도 할머니 말녀(손숙)는 선풍기의 방향만 바꿔줄 뿐, 결사코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는다. 필자의 예상이 빗나가길 바랐거늘, 장손 성진(강승호)이 고향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집안에 에어컨 바람이 구석구석을 돌며 열기를 식힌다. 손주만 사람이냐며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지만, 누구 하나 지금까지 이어온 부당한 처사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인다. 차별에 익숙해진 탓인지 저항을 시도해 보다가 꺾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이 집안의 불평등함이 연약하게 느껴진다.

 

 가부장제라는 부실한 지배구조는 집안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장손들에게마저 영향을 미치는 듯 보인다. 제사를 마친 심야의 저녁상에서 성진은 피하고 싶은 대물림을 강요받는다. 성진의 아버지 태근(오만석)은 성진에게 지금 하는 (영양가 없고 비전이 안 보이는) 영화 일을 때려치우고 고향에 내려와 두부 공장을 이어받으라며 명령조로 제안한다. 성진이 단호한 거절에 일순 집안의 공기는 얼어붙고 카메라는 큰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얼굴을 조명한다. 난감함과 당혹감에 얽힌 표정들이 화면에 가득하지만, 집안의 어른 승필(우상전) 앞에서는 그 표정들이 하나같이 맥을 추지 못한다. 개인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는 걸 다들 아는 눈치지만, 큰 어른의 심기를 거스르고 성진의 의지를 두둔할 용기는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성진의 거부에 불같이 화를 내는 태근이 이상하게 안쓰럽다. 태근이야말로 집안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본인의 의지를 꺾은 채 사진사를 그만두고 가업을 이어가는 인물이다. 장손으로 태어난 자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에 잠식되어 버린 태근의 지난 청춘 탓일까. 젊은 날의 본인과 아들의 현재가 분명 겹쳐 보일 것인데도 태근은 성진에게 빈말로라도 아들의 꿈을 응원하지 않는다. 미화의 남편 재우(강태우)가 공장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핏줄을 위시하며 당연히 가업은 장손이 이어야 한다는 아집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계절은 가을의 옷을 입고 산천을 단풍으로 물들일 무렵, 성진의 할머니이자 집안의 중심을 잡아준 말녀가 세상을 떠난다. 갑작스러운 말녀의 사망으로 집안은 슬픔과 상실로 가득하다. 오랜 세월 신뢰 깊은 아내였고 인자한 어미였으며 사랑스러운 할머니였던 말자의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온 가족이 예를 다하는 모습이 감동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뭉클한 감동도 잠시, 말자의 유해를 선산으로 모시는 과정에서 성진네 증조부모의 산소가 비어있음이 드러난다. 그동안 정성을 다해 모시던 조상님의 존재가 의심의 눈초리에 둘러싸여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하는 후손들에게 실망과 허망이 되어간다. 허나, 조상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가족들에게 승필은 끝끝내 침묵과 헛기침으로 일관한다. 기어이 집안의 든든한 기둥인 줄 알았던 승필이 비겁하고 나약하게 느껴지고야 만다. 빈 산소가 발각되는 시점에서부터 성진네 집안은 그동안 참아온 갈등이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이 중 혜숙(차미경)이 말녀에게 맡겨두었다는 돈의 진위가 가장 두드러지는데,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태근 내외와 혜숙은 험한 말을 내뱉으며 싸우는 소리가 서글플 따름이다. 피를 나눈 형제지간이 돈 앞에서 무너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노라니, 남의 일 같지 않아 두렵기까지 하다.

 

 이 모든 갈등을 영화는 성진의 시선에서 담아낸다. 말녀가 세상에 존재하던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손님처럼 데면데면하게 집안에 자리하던 그가 말녀의 사망 이후 흔들리는 집안의 중심을 그나마 지탱하고 있다. 더불어 성진은 할아버지 승필과 아버지 태근이 감춰온 과거를 통해 자신이 짊어져야 할지 모를 집안의 가장이라는 자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할아버지가 겪은 전쟁의 참혹함과 아버지가 몸을 내던졌던 민주화운동의 후유증을 마주하며 성진이 체득한 가장의 역할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영화의 말미, 혜숙과 태근의 갈등으로 벌어진 화재 사고를 어느 정도 수습하고 다시 본가를 떠나 상경하는 성진과 그를 배웅하는 승필. 성진이 택시에 타기 직전, 승필은 성진에게 너만 알고 있으라.’ 말하며 통장을 건넨다. 통장을 펼쳐보니, 승필과 말녀가 오랫동안 저축해 온 기록들이 빼곡하다. 축적된 기록이 손주를 향한 무한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집안에서 여자로 태어난 존재(혜숙)에 대한 비정함으로 읽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승필은 또 하나의 부담을 성진에게 건넨 채 무수히도 올랐을 선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녹지 않은 눈과 서리들이 곳곳에 자리한 그들의 터전에 언제쯤이면 봄이 올지 염려가 화면 가득 깃든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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