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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리뷰 : 이별을 받아들이기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2. 24.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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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이별을 받아들이기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은 그 기쁨의 크기만큼 이별의 그늘을 드리우기 마련이다. 게다가 더없이 행복한 순간에 느닷없이 닥쳐온 이별이라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받아들이기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으리라. 영화는 이별을 부정하고 행복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려 몸부림치는 이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린다. 도무지 현실로 내려서지 못하고 과거 속에 배회하는 서글픈 영혼들의 힘겨운 몸짓을 보며, 어느새 관객은 자신이 겪은 이별을 투영하게 된다. 그리고 짧지 않은 방황의 끝에는 그것을 아픔이나 상처가 아닌 추억으로 극복해내는 치유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초등학생 사야카(니이츠 치세)는 친구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는 자신과 닮아있는 펫 샵의 시바견 루에게 마음이 끌린다. 언젠가는 이별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숙고하고 각오까지 단단히 하며 시작한 인연이지만 이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둘이 함께한 수많은 시간들과 그것만큼 켜켜이 쌓인 아름다운 기억의 퇴적은 갑자기 닥쳐온 이별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루와 함께 지켜봤던 빨간 전철은 여전히 건널목을 지나고, 둘이서만 뛰어놀던 비밀의 공간은 변함없이 푸르르기에 사야카에게 루의 존재는 좀처럼 희미해지지 않고 항상 곁에 있는 듯 또렷하기만 하다.

 

여기 또 한 명의 이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사야카와 우연히 마주친 후세 할아버지(오이다 요시)40년 전에 잃은 아들 코이치로(사토 유타로)를 여전히 기다린다. 지금은 멀리 가 있을 뿐, 꼭 다시 돌아올 거라 믿는 모습이 루를 기다리는 사야카와 닮아있다.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같은 처지를 알아보는 법. 사야카와 후세 할아버지는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서로의 그 마음을 금방 알아챈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이별을 인정하지 못하듯이 상대도 이별에서 헤어날 수 없는 그 아픈 상황에 공감한다. 굳이 묻지도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들은 서로 위로와 응원을 주고받는다.

 

막연히 사랑하는 이가 곁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던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엉뚱한 여행을 떠난다.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먼저 찾으러 가자며 루와 코이치로를 만나러 전철을 타고 어떤 바닷가로 향한다. 그 바닷가는 과거에 후세 할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가던 곳이고, 그곳으로 가는 길에 전철은 사야카가 루와의 마지막 밤에 불꽃놀이를 함께 구경하던 다리를 지난다. 놀랍게도 이 여행에서 두 사람은 원하던 대로 루, 코이치로와 마주한다. 그저 바보 같은 현실 부정이자 부질없는 퇴행으로 보였던 이 여행에서, 오히려 두 사람은 이제 그들과 진짜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예감하게 된다.

 

사야카와 루의 선로를 가로막던 벽이 열리며 달려온 빨간 전철에 루와 코이치로, 그리고 후세 할아버지까지 올라탄다. 사야카에게 받아들이기 힘겨운 이별이 추가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사야카를 비롯한 살아있는 이들과 떠나는 이들이 서로 작별을 고한다. 언젠가 빨간 전철에 동승하게 되는 날까지는 그렇게 헤어짐을 받아들이자는 듯, 손을 흔든다. 열차가 떠나고 혼자 남겨진 사야카. 그 상실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까 걱정하지만 어렵게 받아들인 이별의 빈자리에는 신비롭게 새로운 인연이 깃든다. 설사 그것이 또다른 이별과 이어진다고 할지라도……

 

이별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별을 마주한 이들의 아픔을 토닥이며 그들의 행복했던 기억을 추억한다. 행복한 순간의 밝게 빛나는 표정뿐만 아니라 상실감에 아파하는 모습까지 가까이에서 아주 천천히 비춘다.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하는 이들이 마음을 나누는 장면을 담백하지만 큰 울림으로 스크린에 담아낸다. 특히, 감정선의 흐름에 맞춰 흐르던 음악마저 멈추고 정적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몇 장면에서의 그 침묵과 고요는 이별에 아파하고,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그들의 감정에 관객들까지 깊이 빠져들게 한다. 대사나 음향을 모두 비워내고도 오로지 표정 하나만으로 백 마디 말과 음악보다 충분하고 충실한 감정 표현이 가능함을 영화는 보여준다.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이제는 이별을 고할 겨울의 끝자락을 따뜻하게 장식할 영화이다.

 

-관객 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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