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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은 겨울> 리뷰 : 첫눈처럼 살포시 내리는 사랑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11. 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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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은 겨울>

첫눈처럼 살포시 내리는 사랑

 

영화 <봄날은 간다>(2001) 이후에 가장 일방적이고 잔인한 이별 통보가 남자 주인공에게 벼락처럼 내리친다. “나도 이제 아침 7시에 교통방송 듣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며 수연(목규리)은 석우(곽민규)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좀 전까지 듣고 있던 MP3를 석우에게 들어보라 한다. 도대체 그 MP3에서 무슨 내용이 흘러나올지 알 수 없으나, 그 무엇이든 석우의 귀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5운명1악장 주제 선율, ‘빠바바밤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때 그 MP3를 부수어버리든 되돌려 받든 했어야 하는데 모지리 석우는 다른 건 다 챙겨오면서 하필 그것은 얌전히 돌려주고 왔다. 그리고 그 MP3는 불현듯 석우 앞에 나타나 그의 상처를 후벼 판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석우가 수연과의 이별과 함께 그의 꿈도 접은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제는 고향 진해의 한 시내버스를 운전하고 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영화감독에 비해 시내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반복해서 도는 단조롭고 답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가 운행하는 버스의 노선은 몇 날 며칠을 돌아도 지루할 것 같지 않다. 지방 소도시, 그것도 바닷가의 풍경은 대도시의 삭막함과는 다르다. 아기자기한 건물들과 나지막한 산, 정박 중인 배들이 파도를 따라 넘실거리는 해변도로와 봄이면 꽃이 만발할 벚나무 가로수들이 푸근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길을 운행하는 석우의 모습은 아련함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평온하다.

 

그런 석우의 마음을 단숨에 뒤흔드는 것이 바로 MP3. 버스 터미널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 MP3는 그가 수연에게 선물했던 것과 같아 보이고, 그것을 놓고 간 여자의 뒷모습은 얼핏 보아 수연 같다. 그것이 평온한 듯했던 석우의 마음 표면 아래로 실은 아련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리움의 앙금을 순식간에 뿌옇게 흐려 놓는다. 이유 없이 자꾸만 빼꼼히 열리던 영화 관련 물품으로 가득 찬 그의 창고가 그렇듯, 후회와 미련(영화에서 후회 아니면 미련이라고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둘이 한 몸이다. 후회를 하니 미련이 남는 것이고 미련이 남으니 후회하는 것 아닐까) 어디쯤엔가 있던 그의 마음이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열망으로 불타게 된다.

 

그런데 과거와 이별하지 못하는 석우를 흔들어 놓는 이 MP3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애(한선화)와 새로운 인연의 다리를 놓는다. 뭐든 분명하게 선을 긋지 못해 답답한 석우의 성격과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영애는 사랑과 일 모두에서 자기표현이 분명하고 지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그야말로 한 성격이다. 그런 영애의 마음속에 석우가 들어서기 시작한 이유는 불가사의하지만, 영애는 그를 돕는 일에 적극적이다. 비록 그것이 과거에 연연하는 못난 남자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영애는 자기를 쫓아다니지만 자신의 마음에 어떠한 균열도 내지 못하는 남자가 내미는 꽃다발보다는 차라리 마음이 끌리는 남자의 구닥다리 자전거 뒤를 따른다.

 

사실 지난 과거 따위는 연연하지 않을 것 같은 영애에게도 석우의 MP3와 같이 후회와 미련의 대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탁구이다. 아버지와의 애증이 서린 탁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후회인지 미련인지 궁금해서 대회에 나가보겠다는 영애의 말은 석우가 MP3에 대해 갖는 집착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과거에 대한 확인을 하고 싶은 심리를 표현한다. 두 사람의 목적과 방향은 좀 달라도 어쨌든 MP3와 탁구로 인해 지난 일들은 정리하고 새로운 인연이 시작될 것 같은 기대를 하는 순간, 다시금 그들의 관계 발전에 발목을 잡는 일이 발생한다. 이미 마음뿐만 아니라 관련된 물품들도 모두 정리한 것 같았던 석우는 수연의 재등장으로 인해 주저앉고 만다.

 

마치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말했던 <봄날은 간다>의 순수하지만 그 순수함으로 인해 몹시 답답했던 상우(유지태)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석우에게 먼저 다가서는 것은 역시 영애다. 새드 엔딩이 예상되던 결말이 영애의 쿨내 물씬한 접근으로 인해 분위기가 급반전 된다. 영애는 문제의 그 MP3를 기어코 고쳐왔나 보다. MP3의 이어폰 한쪽을 내어주는 영애는 석우에게 과거를 잊으려 애쓰지 말고 차라리 추억하라는 듯 보인다. 더 이상 가을이 아니라 완연한 겨울 분위기로 스산한 거리를 나란히 걸으며 투덕거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곧 첫눈이 살포시 내려앉을 것 같다. 그리고 둘 중 누군가는 라면 먹을래요?’라고 말할 것 같은 밤이다.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그 라면 말고 그들은 정말 그냥 라면만 먹을 것이다.

 

-관객 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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