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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리뷰 : 어디로, 얼마큼 가고 있을까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1. 10. 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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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

어디로, 얼마큼 가고 있을까

 

세상의 끝1회용 필름카메라로 찍어오라는 방학 숙제를 받은 중학교 1학년 사진부 네 명의 아이들은 공간적인 정의부터 내린다. 이제 갓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이 세상의 끝이라는 막연한 개념 정의에 물리적 장소를 먼저 떠올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리라. 하지만, 세상의 끝을 해남의 땅끝마을이나 남극같이 흔히 인용되는 상징적인 장소가 아닌, 지하철 1호선의 종착역 중 하나인 신창역에서 찾아보기로 그리 어렵지 않게 결정하는 것은 제법 통찰력과 결단력이 돋보이는 선택이다. 우선, 전철의 종착역은 중학생 수준에서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다. 인생을 제법 살아봤다는 어른들 네 명이라면 세상의 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념을 정하는 것부터 오만 가지 생각을 가져와서 한 달 내내 논쟁만 하다가 결론도 못 내리고 끝났을 것을 감안하면 네 친구들의 결정은 경쾌하기까지 하다.

 

나란히 달리던 선로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마지막 전철역에 가면 아이들의 말처럼 뭔가 확실히 끝나는 모습은 분명히 목격할 것만 같다. 수십 년에 걸쳐 지하철을 타봤음에도 종착역의 풍경이 어떠한지 단 한 번도 궁금해 본 적이 없었던 필자도 이름조차 생소한 신창역의 풍경이 궁금해져서 아이들의 여정에 자연스레 동행하게 된다. 물론, 중학생 수준에서 평소 활동 반경을 넘어서는 세상의 끝을 찾아가는 길은 역시나 만만치 않다. 일단 올라탄 전동차 안에서도 노선도를 보며 네 아이들은 진지한 논의를 한다. 서로의 어깨에 기대 졸기도 하고 열차를 잘못 타서 목적지에 못 미친 엉뚱한 역에서 내리기도 한다. 더 갈 것인지, 거기에 가면 이곳과는 뭔가 다른 것이 있기는 할 것인지 고민도 한다. 그 와중에 카메라로 갖가지 풍경도 담는다. 어차피 세상의 끝에 대해 정해진 것은 없으니 모든 장면이 실은 세상의 끝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영화는 중학생 아이들이 어떠한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로드 무비의 수준을 넘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세상의 끝이라는 개념 자체가 말 그대로 공간적인 어딘가의 말단이 되는 것일 수도 있고, 궁극의 목표 같은 정신적인 지향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 아이들이 경험하는 일들 자체가 그 어떤 것에도 다 해당할 수 있는 얘기들이며, 그것은 어른들도 평생 그 답을 찾아 헤매는 보편적인 인생의 숙제와도 같은 문제로 확장된다. 어떤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정해진 답이 있을 수 없고 그 목표라는 개념 자체가 고정화된 절대 진리라 할 수도 없음을 알고 있기에 아이들의 여정은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이들이 신창역에 이르는 길에서 겪는 여러 우여곡절과 막상 신창역에 이르러서도 그것이 세상의 끝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은 아이들만큼이나 어른들의 머릿속도 복잡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곳에 가면 정말 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가봐야만 할 경우 어떻게 그곳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떠오른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설혹 길을 잘못 든 경우에 실망하고 갈등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곳에 생각지도 못했던 즐거움과 위안을 발견하는 반대급부가 있을 수도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아이들이 길을 잃고 다투다가 느닷없는 소나기를 만나서 뜻하지 않은 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어른들도 때론 저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아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길 한번 잃지 않고 항상 가장 빠르고 적확한 길만 걸을 수는 없다. 그 길이 맞는 길인지 아닌지는 직접 들어가 걸어보지 않고는 판단할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더불어, 어쩌면 길은 결국 어딘가에서는 만나게 되어 있는데 미리 길을 잃었다고 낙담하고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아이들과 일정 거리를 두며 그들의 행동과 이야기에 개입하지 않고 철저히 바라보는 시선을 유지하듯,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길을 떠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조금은 헤매거나 돌아가도 그것이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스스로 길을 찾는 방법을 터득할 기회를 주어야 하리라. 영화는 예상치 않은 낯선 곳에서 밤까지 함께 보낸 네 아이들이 맞이한 아침의 평범한 풍경 사진과 함께 끝난다. 마치 이후에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태도다. 아침을 맞이하며 문밖의 풍경을 찍는 이 아이들은 분명히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을 조금쯤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는 듯한 그 결말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문득 생각이 스친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과연 얼마큼 걷고 있는 것일까?’

 

-관객 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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