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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밍> 리뷰 : 로프 끝에 매달린 두 생명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1. 6. 25.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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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밍>

로프 끝에 매달린 두 생명

 

영화는 여성이 임신이라는 낯선 사건을 통해 겪게 되는 정서적 경험을 매우 강렬하고 충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감독이 밝힌 바와 같이 영화는 임신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대충 아름답게 그리며 역시 생명은 소중하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숭고한 존재로서의 여성어쩌고 하면서 적당히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다. 임신으로 인해 여성이 느끼게 되는 사회적 존재로서 그리고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아에 대한 위협적인 요소들에 대해 신랄하고 직접적인 표현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제껏 보여진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과 시각으로 임신과 여성에 대해 고민하고 이것을 왜 공포물의 형식으로 만들었는지 관객들을 납득 시킨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는 클라이머로 등장하는 세현이다. 그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클라이밍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앞에 놓인 현실은 녹록지 않다. 세 달 전에 겪은 교통사고로 인해 컨디션은 잘 올라오지 않고 경쟁자인 아인은 가까운 거리에서 세현의 신경을 거스른다. 게다가 곁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야 할 우인은 결혼과 임신과 같은 문제로 오히려 세현에게 부담감만 안겨준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얘기다. 경력과 성취를 위해 중요한 시기에 결혼과 임신은 여성에게 최대 고민거리가 되는 것이 아직 이 사회의 현실이다. 거기에 더해 도움은커녕 일만 복잡하게 만드는 남자까지 어느 것 하나 자기 편이 아니다.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아는 임신한 상태로 등장하는 세현이다. 그에게는 건강하게 아이를 낳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거동은 제한적이고 예비 시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불편한 상황은 세현을 막연한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이번엔 우인과 격리되어 아예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 ‘잘 먹어야 기운 낸다는 시어머니의 얘기는 며느리에 대한 걱정보다는 태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낸다. 경험해보지 못한 신체적 변화로 인해 겪게 되는 불길한 정서는 공감받기 보다는 네 불안이 키운 망상으로 치부되는 시월드의 전형적 모습 앞에 묵살된다. 이번에도 역시 남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채 혼자인 세현의 외로운 투쟁이 되어버린다.

 

이렇듯 어떤 선택에서도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여성으로 대표된 세현의 두 자아가 고장 난 휴대폰을 매개로 연결되며 치열한 다툼을 벌인다. 아이를 원하는 세현은 클라이머 세현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출산에 성공하며, 아이를 가로채려는 시어머니를 살해해서라도 자신의 아이를 지키려 한다. 반면에 클라이머로 세계 정상에 서고 싶은 세현은 철저히 자신의 성공에만 몰입하여 그것을 위협하는 태아를 없애려는 시도를 하고, 기어이 아이를 낳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목 졸라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강한 의지로 세계대회에 출전한 세현은 끝내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로프에 옭아매어져 추락한다. 어느 쪽도 완전한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는 어느 쪽의 세현이 실재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게 만들고,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시공간마저 뒤섞으며 부조리한 상황을 연출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임신이라는 사건이 여성에게 일으키는 낯선 심리적 경험에 집중하고 이것을 공포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사회적 성공과 출산 사이에 갈등하고 분열하는 세현의 심리적 고통을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배경과 함께 강렬한 장면과 이미지로 과감하게 표현하며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한다. 오히려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어 좀 더 기괴한 모습으로 공포와 긴장을 조성한다.

 

영화의 끝은 씁쓸하고 쓸쓸하다. 세현의 두 자아 모두 원하던 것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마치 꿈에서 깨듯 모든 치열함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아이와 세현만이 남겨진다. 싸우고 갈등했던 타인들은 공허한 축하 인사를 서로 주고받다가 모두 스크린 밖으로 사라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임신과 출산은 철저하게 세현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빈 병실에 홀로 남아 말없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은 마치 클라이머 세현의 항의라도 받는 듯한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바닥으로 추락한 세현이 파멸에 이르는 것이 아닌, 그의 추락을 불렀던 그 로프가 그와 태아, 두 생명을 연결하는 탯줄로 형상화하는 장면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석연치 않은 감정을 남긴다.

 

-관객 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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