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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곳> 리뷰 : 이야기를 듣는 소설가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1. 4. 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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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곳>

이야기를 듣는 소설가

 

타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능력은 구체적으로 어딘가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최근 몇 년간 소설을 써왔지만, 소설가로서 이런 능력이 무슨 도움이 되었던 기억은 한 번도 없다. 몇 번쯤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기억나는 것은 없다. 상대방이 말하고, 내가 들었던 그 이야기들이 내 안에 쌓여가는 것뿐이다. 중략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생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일종의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앙금이란 그 무력감을 말한다. 우리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건 이러한 무력감의 본질이다-무라카미 하루키의 회전목마의 데드히트』에서 인용

 

 

추운 겨울, 미국에서 서울로 돌아온 소설가 창석은 미영, 유진, 성하, 주은과 각각 만난다. 창석은 그들과 차나 술을 마시면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창석에게 정말 느닷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처음 보거나 혹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갑자기 말해도 괜찮을지 모를 이야기를 말이다.

 

그들의 속내를 잠자코 듣는 창석(연우진)의 시선과 함께 우리는 네 인물의 첫인상과 다른, 생각지 못한 면들을 만나게 된다. 당돌한 소개팅녀인 줄 알았던 미영(이지은)은 사실 기억이 온전치 못한 창석의 가족이었고, 냉정하고 개인주의자인 줄로만 알았던 후배 유진(윤혜리)은 얼마 전 두 번의 큰 헤어짐을 겪었다. 웃는 인상의 사진사 성하(김상호)는 아내의 죽음을 함께 끌어안고 있었다. 껄렁한 말투의 바텐더 주은(이주영)은 손님을 소재로 한 시를 쓰는 시인이며, 죽음에서 벗어나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일상적이지 않은 톤의 말투로 말한다. 작가가 어떠한 면을 꼬아 만든, 소설 속 인물 같다는 인상을 준다.

 

역 안 카페, 겨울 숲, 바 등 영화 속 배경은 소설 같은 분위기를 더한다. 영화의 맨 처음 주인공 미영은 창석과 역 안 카페에 앉아 있다. 카페의 창밖에는 갑갑한 역에서 사람들이 바삐 어딘가로 향한다. 그와 달리 카페 안은 책을 읽고 바둑을 두는 등 가만히 자신의 느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젊은 인상의 미영과 창석은 또 다른 섬인 듯 눈에 띈다. 하지만 첫 번째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는 미란이 카페 안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의 상황인 걸 알 수 있다. 세 번째 이야기 주인공 사진사 성하는 우연히 만난 창석에게 아내의 투병 소식을 전한다. 바깥 풍경은 한창 낮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있는 카페 안은 매우 어두컴컴한 채로 적은 빛만을 허용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성하가 연거푸 말하는 희망과 닮아 있다.

 

그들의 대화 도중에 죽은 새, 청산가리 약통, 바텐더의 시 등 막연한 요소들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나중에 서로 느슨하게 얽히면서 내 머릿속 이야기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우린 이 진짜일지 가짜일지 모를 이야기를 수긍하게 된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서도 그런 작위적인순간들이 있어왔으니까.

 

남의 이야기가 느닷없이 쏟아질 때 창석은 얼떨떨함을 감내하며 듣는다. 그리고 말하는 이들의 표정, 순간순간 하나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 모습은 그의 직업 소설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은 창석이다. 이전의 대화 속 작은 단서들을 통해 창석 또한 남들이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창석은 네 인물과의 대화에서 잠자코 청자의 역할로 있다가 마치 보답처럼 지어낸 듯한 이야기를 건넨다. 그 이야기들에 사실이 어느 정도 섞었을지 알 수 없다. 그의 속내를 직접적으로 내비치는 순간은 버려진 공중전화기 부스 안에서 미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할 때다. 아내는 창석의 떼어낼 수 없는 아픔 그 자체이다. 청자일 때와 달리 창석은 아내에게 그만 괴로워지자고 애걸복걸하고 슬픔을 토로한다. 그의 이야기에도 죽음이, 상실이 담겨 있다. 그다음 날 창석은 자신과 남의 이야기 모두를 품은 채 다시 서울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다.

 

우리는 어쩌면 타인에 대해 매번 소설가가 되는 게 아닐까? 언젠가 내가 알던 모습과 매우 다른, 타인의 얼굴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걸 내 안에서 재조합하고 를 붙여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게 꼭 그 사람의 진실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남의 이야기에서 , 나의 이야기에서 은 제외되지 않는다. 삶에서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것도, 아픔을 끊임없이 떼어낼 수 없는 것도. 그렇게 우리들은 조금씩 다르고 조금씩 닮아 있다.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창석의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창석의 소설 속에서 어떤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그 순간 창석 본인은 또 어느 정도 스며들어 있을까? 그가 품은 앙금들 중 어느 정도를 풀어낼까?

 

-김곰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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