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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터> 리뷰 :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모든 영혼들을 위한 위로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1. 3. 2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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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모든 영혼들을 위한 위로

 

영화가 시작되면 배우 임성미는 없다. 오로지 탈북자 리진아만이 존재할 뿐이다. 14년 차 배우 임성미는 그의 첫 장편 주연을 꾹꾹 눌러 채워서 연기한다. 대사가 많지 않고 클로즈업이 대부분이기에 표정으로 다양한 감정의 변화와 함께 메시지 전달을 해야 한다. 도망갈 곳 없는 링 위에 홀로 올라 외로이 싸우는 파이터의 숙명처럼, 그는 다른 인물들의 도움 없이 스크린의 상당한 부분을 스스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눈썹의 실룩거림 하나만으로 분노와 집념을 구분하여 표현하고 대사 한 마디로 수많은 장면을 압축하여 전달해야 한다. 감독이 선택한 너무나 흔한 권투 영화와 성장 영화라는 사각의 링 위에서 리진아는 그렇게 고군분투한다. 어차피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이미 거의 다 나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재를 기존의 영화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영화는 리진아의 표정과 심리 변화에 작정한 것처럼 집중한다. 이것은 윤재호 감독의 다큐멘터리적 연출법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이 영화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주요 지점이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리진아에게 감정이입이 되고 그의 고통과 기쁨에 나도 모르게 동기화가 되는 것을 보면, 이 모든 부분에서 임성미는 꽤나 성공한 것 같다.

 

영화는 대사 없이도 얼마나 많은 감정과 서사를 전달할 수 있는지, 그리고 대사 단 몇 마디로도 그 인생의 곡절을 짐작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진아는 하나원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하게 된 그의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단지 숨을 한번 크게 고르고 잠시 눈을 감는다. 북한에서 도망쳐 남한으로 들어와 독립하기까지 겪었을 목숨을 건 고통의 여정을 그 한 장면으로 가늠할 수 있다. 진아, 태수(백서빈)와 관장(오광록)까지 셋이서 소주를 마시는 장면에서는 한참이나 대사 없이 각자 술만 들이켠다. 마치 모든 할 말은 마른 오징어에 다 담았다는 듯이 오징어만 억세게 씹는다. 세상에 그저 묵묵히 오징어를 씹는 장면이 이보다 더 긴장되고 슬픔 가득할 수 있을까. 한참이나 이어지던 그 길고 묘한 침묵은 진아로 인해 다치게 됐음에도 자신의 실수로 발생한 사건으로 감싸주었다는 생모에 대한 이야기에 결국 눈물로 이어진다. 관장의 몇 마디가 이어진다. “울어도 돼. 억지로 참지 마. 살다 보면 울어줘야 할 때가 있어.” 이 몇 마디에 미간을 꿈틀거리며 꾹꾹 눌러왔던 진아의 울음이 폭풍처럼 터져버린다. 그렇게나 꽁꽁 숨겨왔던 그의 감정은 그것을 가장 온전히 이해할 것 같은, 그래서 그 말을 하는 관장의 과거도 대충 짐작이 가는 그 몇 마디 말에 통곡으로 쏟아진다. 덕분에 켜켜이 쌓여있던 해묵은 감정이 해소되며 진아는 증오와 원망을 내려놓고, 외부를 향해 쌓았던 마음의 벽을 허물게 된다.

 

영화의 관점은 고전적인 것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을 일궈내는 장면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것, 그리고 다시 도전하는 그 과정에 주목한다. 마지막 엔딩에서 진아는 나는 계속 싸울 것이다. 끝까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거다라고 말한다. 그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링 앞에 섰을 뿐 정작 링 위에는 아직 오르지도 않았고, 단지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음으로 승리의 의지를 불태울 뿐이다. 하지만, 이제 승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다짐처럼 만약 강 펀치를 맞고 쓰러져 비록 이번 경기에는 패배를 하더라도, 그는 다시 일어설 것이고 이길 때까지 계속 도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넘어지는 것에 좌절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에 더해 고통과 편견 때문에 스스로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홀로 싸우겠다는 생각보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과 손을 잡으며 꿋꿋하게 이겨내자는 응원도 잊지 않고 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운명이다. 혼자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삶의 의미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할 때 찾아지는 것이다라는 토마스 머튼의 명언을 굳이 오프닝에 보여주었듯이.

 

-관객 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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