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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쓰는 영화비평 2] 믿음과 구덩이의 여정 - 지연희

SPECIAL 기획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0. 2. 23.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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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2019년 11월과 12월 동안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진행한 "처음 쓰는 영화비평" 워크숍 수강생의 글을 모은 비평집에 실린 글입니다.


<메기>(이옥섭, 2018)

믿음과 구덩이의 여정

/ 지연희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2003년부터 자체적으로 인권영화를 제작해왔다. <여섯 개의 시선>(박찬욱 외, 2003), <다섯 개의 시선>(김동원 외, 2005), <시선 1318>(김태용 외, 1008), <날아라 펭귄>(임순례 외, 2009) 등 뚝심 있는 감독의 장·단편 인권영화를 제작했다. 앞선 감독들이 인권 문제를 통해 영화적 비전을 충분히 담아낸 작품을 만든 것처럼, 이옥섭 감독 역시 그러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메기>는 우리의 삶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인권 문제들을 다룬다. 동시에 감독은 특유의 연출력과 스토리,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매력적으로 영화를 엮어나간다. <메기>를 단순히 인권위원회에서 만든 교훈적인 인권영화로만 본다면, 이 영화의 재미를 전부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권 문제를 믿음과 구덩이의 테마를 가지고 이끌어간다.

 

주인공 인영(이주영)은 영화 시작부터 곤란한 문제를 맞닥뜨린다. 병원 엑스레이 실에서 몰래 촬영된 필름의 주인공이 자신인 것 같다. 찍은 사람이 문제인데 아무도 그를 궁금해하지 않고, 사람들은 찍힌 사람이 누구인지만 궁금해한다. 영화에는 이미 해결책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인영은 세탁소에서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해 계시처럼 메시지를 받았다. 병원을 그만둬야 할지 잠시 고민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불법 촬영물에 관해 피해자가 잘못한 것은 없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다가오는 시련의 해결책을 찾아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영화가 아니다. 명확한 지침이 있고 인영은 거기에 따라 선택한다. 인영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아 보이는 선택을 통해 문제들을 정면 돌파한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문제의 구덩이에 빠져나온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이 구덩이를 현실에 정말로 존재하는 싱크홀로 만들어버린다. 메기가 어항 위로 펄쩍 뛰어오를 때, 대한민국에는 엄청난 싱크홀이 하나씩 생긴다. 싱크홀은 멀쩡해 보이는 땅에 균열을 일으킨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이 위험한 균열에 경각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싱크홀 공사장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은 싱크홀 복구하는 걸 구경하면 안 되냐고 한다. 싱크홀 주변은 위험하다. 작업자는 안 된다고 한다. 세상을 구한 메기(부제: the fish who saved the world)는 어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냐고 덧붙인다. 이 영화 속의 싱크홀은 단순하게 보면 인권 문제 그 자체이기도 하고, 그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시험대이기도 하다. 가능하면 빠지지 않는 게 제일 좋고, 빠져있다면 얼른 빠져나와야 한다. 어떤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여러 가지 구덩이를 통과해야 한다. 본인의 문제라서 직접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거나 아니면 여기에 빠지지 않고 잘 건너가야 한다. 이것은 인영이 했던 믿음 훈련의 연속과 같다. 하나, 세탁소에서 세탁을 골라서 하는 것 같다. , 몰래 촬영된 엑스레이 필름의 주인공이 자신인 것 같다. , 모든 직원이 한꺼번에 아파서 출근을 못 한다고 한다. , 조직폭력배 같은 사람이 사슴 사냥을 하다가 자기 배에 총알이 박혔다고 한다. 다섯, 병원에 있던 메기가 펄쩍 뛰어올랐으니 지진이 날 것이다. 여섯, 백금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가 훔친 것 같다. 일곱, 성원(구교환)이 전 여자친구를 때렸다고 한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인생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까지,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인영은 사람들을 믿기로 한다. 적어도 그렇게 말은 했다. 하지만 어떤 문제는 믿지 않고 의심해서 구덩이를 통과했다. 문제는 뒤로 갈수록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는 데서, 무엇을 믿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더욱 복잡한 방향으로 흐른다.

 

많은 인권영화들이 어떤 문제를 보여주고 관객에게 3자의 입장으로 좀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식의 연출을 자주 보여왔다면, <메기>는 그러한 방식을 벗어난 점에서 새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인영이 믿음을 무기로, 의심을 방패로선택을 통해 구덩이를 통과하는 여정을 간접경험하는 영화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제시한 문제에 대해서 관객이 선택을 고민해야 할 여지를 많이 남겨놓지 않는다. 2019년의 관객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이미 명확한 태도를 알고 있다. 불법 촬영물 때문에 현실에서 도망을 쳐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삶의 터전에서 재개발을 명목으로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고, 사랑하는 연인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연대해야 한다. 끊임없는 구덩이의 시험은 누구에게 연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여자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성원은 싱크홀에 빠지고, 피해자에게 연대한 인영은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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